내란죄 피의자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14일 저녁 서울 여의도 국회 일대에서 열린 범국민촛불대행진 집회에 나온 시민들이 응원봉과 손팻말을 흔들고 있다. 김영원 기자 forever@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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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재권 | 더밀크 대표
“동료들이 물어봅니다. 한국에서 왜 갑자기 계엄을 선포했냐고요. 요새는 만날 때마다 물어봅니다. 미국인들도 ‘마셜 로’(Martial law·계엄)란 단어를 처음 들어봤다고 하더라고요. 창피합니다.” 실리콘밸리의 빅테크 기업에 다니는 한인 엔지니어는 계엄과 탄핵 사태가 벌어진 이후 동료 직원들이 자신을 만날 때마다 한국의 정치 동향을 묻는다며 괴로워했다.
계엄령 해제와 탄핵소추까지 질서정연하게 이뤄지는 것을 보며 한국 민주주의의 확고함과 회복력에 감탄하는 미국인 동료도 일부 있다고 했다. 하지만 평범한 미국인들은 미국 주류 언론에 보도되는 대로 ‘퍼스트레이디 스캔들’이나 ‘무속을 믿는 대통령’ 등 해외토픽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는 “그동안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하고 미국에서도 영향력을 키우고 있는 21세기 선진국 한국에서 왜 시대착오적 사태가 벌어졌는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고 전했다.
마지막 계엄령이 선포된 45년 전과 지금은 미국 내에서 한국의 위치와 영향력이 같을 수 없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북한과 한국을 구분하지 못하는 평범한 미국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무시할 만한 나라 수준이 아니라고 여긴다. 특히 혁신의 본고장인 실리콘밸리에서 보는 한국은 대단히 저력 있고 글로벌 공급망 체계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나라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와 넷플릭스 창업자인 리드 헤이스팅스, 그리고 엔비디아, 구글, 메타, 오픈에이아이의 최고경영자인 젠슨 황, 순다르 피차이, 마크 저커버그, 샘 올트먼 등 글로벌 테크 리더들은 한국을 한번 이상 방문했다. 이들은 또 한국의 제품과 서비스를 미국으로 가져와 글로벌화하는 데도 기여하고 있다. 실리콘밸리 기업에 한국은 ‘로컬’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한국은 구글이 유일하게 검색엔진 1위를 기록하지 못한 나라이고 싸이와 방탄소년단(BTS)은 유튜브가 글로벌화하는 데 기여했다. ‘오징어 게임’이 말해주는 넷플릭스와 케이(K)콘텐츠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다. 이 밖에도 애플과 삼성 간 관계, 엔비디아와 한국의 관계 등은 한국이 지난 20년간 혁신의 ‘린치핀’ 구실을 했음을 증명한다.
특히 2021년에 나와 넷플릭스 사상 최고 인기 콘텐츠 기록(90개 이상 국가에서 최고 시청률 기록)을 세운 ‘오징어 게임’은 단순히 케이드라마의 우수성을 보여줬다는 의미를 넘는 작품이다. 불평등, 성차별, 이주노동자 차별, 정경 유착과 비리 등 한국 사회의 복잡성과 모순을 그대로 드러냈고, 이 사회가 지닌 통찰력을 외부 세계에 알렸다. 이는 고도의 민주주의와 사회적 안정을 달성한 국가에서나 가능한 자기비판의 메시지였고, 많은 국가 시청자에게 충격을 줬다. 한국은 이렇게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숙한 국가이며, 시스템이 갖춰져 있고 그에 따른 리더십이 있다는 것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 시대착오적 계엄과 탄핵 사태는 한국의 리더십을 의심하게 하는 사건임에 분명하다. 실리콘밸리의 한 벤처캐피털리스트는 “이번 건은 크다. 한국이 믿을 만한 국가인지 의심받고 있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한국이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리더십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이젠 그렇지 못한 것을 넘어서 시대착오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국가로 인식될 가능성이 크다. 생성형 인공지능(AI), 에너지, 헬스케어 등 기술 혁신의 가속도가 붙은 상황에서 리더십이 차지하는 역할은 절대적이다. 앞으로 들어설 한국의 새로운 리더십은 시대적 혼란을 극복하고, 기술 혁신과 미래 비전을 통해 신뢰를 재구축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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