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존재하는 세상을 연구하고, 공학은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을 만든다. 픽사베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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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존재하는 세상을 연구하고, 공학은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을 만든다.”
-시오도어 칼만(1881~1963)-
과학이 발견한 지식을 현실에 구현하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은 공학이다. 자연 철학에 뿌리를 둔 과학은 추상적인 지식 ‘정보’를 다루지, 현실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학문은 아니다. 생물의 유전 ‘정보’만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무리 정교하고 복잡한 생명 정보를 품고 있는 유전자가 있어도, 적재적소에서 해당 정보를 단백질로 발현시키는 RNA 시스템이 없으면 생명은 존재할 수 없다.
과학 지식이 현실에서 구현되기 위해, RNA 역할을 하는 것이 공학이다. 공학은 기술과 다른 개념이다. 기술은 할 수 있는 능력의 개념이라면, 공학은 현실 문제의 해결이라는 목표 달성 개념이다. 과학과 기술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며, 과학기술이라고 묶어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이 잠재력을 현실 문제 해결을 위해 발휘하는 것이 공학이다. 과학기술이 있어도 현실 수요가 없으면 공학은 작동하지 않는다. 반대로 현실 수요가 있어도 과학기술이 없으면 공학은 작동할 수 없다. 마치 생명정보와 기능이 같이 진화하는 것처럼, 과학기술과 공학도 상승 상호작용을 통해 동반 진화한다.
공학과 예술이 무슨 관계인가 싶겠지만, 기술은 예술과 같은 뿌리에서 출발하였다. 명장의 기술을 예술에 빗대어 표현하고, 높은 기술적 완성도를 지닌 물건을 공예품이라고 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예술은 당대의 문화를 현실에 구현하는 기술적 성격을 가진다. 울산 반구대의 고래 암각화나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의 사냥 벽화는 문자가 없던 시절에 사냥감에 대한 정보를 후세에 전달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예술이자 정보 공학의 결과물이다.
벽화뿐 아니라 춤, 노래, 의식 등 행위 예술도 후대로 정보를 전승시키는 기술 구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추상적인 개념을 현실에 구현하는 능력이 기술이다. 이런 측면에서는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기예’가, 본질에 더 근접한 단어라고 할 수 있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인문학을 ‘libaral arts’라고 하는 것도, 사람들의 공감을 다루고 현실화하는 기예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발견, 공학은 발명이다. 공학자를 의미하는 engineer는 창의적이고 똑똑한 사람을 의미하는 genius와 동일한 어원을 가진다. 공학은 과학기술을 이용해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현실적이라는 것이 공학과 과학을 구분하는 중요한 차이점이다. 과학은 순수한 지적 호기심만으로도 추구가 가능하지만, 공학은 현실 수요가 절대적인 동력으로 필요하다. 쓸모없는 지식을 탐구하는 과학은 존재할 수 있지만, 쓸모없는 물건을 만드는 공학은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과학과 달리 공학은 인문학과의 접점이 중요하다.
반면 과학은 인문학과의 접점이 없을수록 진실에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 과학이 탐구하는 자연 법칙은 우주의 탄생부터 존재하던 것으로 인간의 사정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학은 문명이라는 인간 세상에서 과학기술을 통해 사람에 의해 구현된다.
세계 각지의 고인돌은 선사시대 인류의 대표적인 공학 작품이다. 사진은 스페인 아라곤지역의 고인돌. 위키미디어 코먼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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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 현실 문제 해결하려 등장
인류 문명에서 공학의 시작은 과학보다 앞선다. 우리나라에서 많이 발견되는 고인돌은 선사시대 대표적인 공학 작품이다. 고인돌은 백 톤 이상의 돌을 쌓아올려 만든 무덤이다. 사람의 힘만으로 이 무게를 움직이려면 최소 500명이 필요하고, 무게 중심도 어떻게 맞출지 미리 생각을 해야 한다. 고인돌을 만드는 것은 사전 설계, 시행 계획, 공사 시행의 과정을 거치는 현대 토목 공사와 동일한 행위라 할 수 있다.
죽은 사람을 성대하게 매장하는 것은 인간을 짐승과 구분하는 특징의 하나다. 사후 세계는 사람이 걱정하는 불확실성의 범위가 현실 세계를 넘어서 확장되었다는 의미다. 생존에 급급하면 죽은 뒤의 일을 걱정하는 것은 사치다. 따라서 고인돌이 많다는 것은 당시 한반도에 살던 사람이 안정적이고 풍족한 집단생활을 했다는 증거다.
무덤을 크게 만드는 것이 왜 현실적 문제인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이를 이해하려면 현대가 아니라 선사시대 농경 집단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선사 시대에는 소규모 집단의 생존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리고 정착 생활이 필수인 농경 집단은 생존을 위해 지켜야 할 땅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도자의 무덤은 주변에 자기 집단의 세력 정보를 전달하는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 거대한 돌을 쌓을 만큼 집단의 규모와 힘이 크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조상 무덤을 치장해 자신의 성공을 주변에 알리는 관습은 지금도 존재한다.
문명의 여명기에 과학, 기술, 공학을 구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지만, 농경이라는 현실적 문제 해결을 위한 공학적 성격의 학문이 먼저 발달하였다. 고인돌 같은 거석 유적은 세계 각지에서 발견된다. 특히 농경 규모가 컸던 지역에서는 신전도 많이 건설되었는데, 이 역시 현실적 수요 반영이다. 현실적이라는 단어는 물론 선사시대의 현실이다. 신전은 엄청난 노동력이 투입되는 농사의 결과가 풍작이 될지 흉작이 될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의 불안감을 달래주었다. 이런 표면적 이유와 더불어 천문 관측 시설을 위한 공학적 산물인 경우가 흔했다. 당시 농사 절기를 알려주는 달력은 하늘의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매일 변하는 별자리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는 방법은 움직이지 않는 커다란 돌에다 표시를 해두는 것이다. 신관은 하늘의 별자리 움직임을 관찰해 파종과 수확 시기를 알렸다.
대규모의 노동력이 필요한 농경문화는 집단을 확장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집단이 커지면 식량 공급을 위해 농경의 규모도 같이 커져야 한다. 야생의 땅을 개간하고, 물을 대기 위한 수로를 만들고, 집단의 정주 생활을 위한 거주지도 건설되었다. 다른 학문 용어는 대부분 고대 그리스어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공학의 경우 고대 로마의 라틴어에 어원이 있다. 지식 정보에 대한 학문적 탐구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되었지만,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공학은 고대 로마에서 본격적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로마 문명은 도시 국가 수준을 넘어 제국으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상하수도, 신전, 관공서, 주택, 극장, 도로 등을 건설하는 토목 공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한다. 사회적 인프라가 없이 넓은 지역에 퍼져 있는 제국을 지속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가의 인프라를 건설하는 공학을 ‘civil engineering’이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문명을 건설한 공학이라는 깊은 뜻은 사라지고, 토목 공학이라는 무미건조한 일본식 번역이 더 널리 사용되고 있다.
르네상스 이후 과학과 공학은 제대로 상호작용하며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15세기 르네상스시대의 과학자이자 공학자, 예술가, 건축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행기 스케치. 위키미디어 코먼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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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무생물에서 동력을 얻다
서양의 중세는 과학의 암흑기였지만, 종교를 위한 예술과 공학의 수요는 지속된다. 그리고 르네상스 이후 과학과 공학은 제대로 상호작용하며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시기까지 공학자는 학문적 기술자라는 특징을 가진다. 한마디로 과학, 기술, 예술, 공학 등에 모두 뛰어난 다빈치 같은 팔방미인이었다. 신의 도그마에서 벗어난 과학이 급격하게 진화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봉건제의 붕괴와 도시 팽창으로 공학적 수요도 급격하게 늘었다.
그러다 뉴턴의 프린키피아라는 과학 특이점을 계기로 공학도 학문적 성격을 가지기 시작한다. 이후 공학과 과학의 상호작용은 수학을 통해 이루어진다. 과학은 자연을 수학으로 설명하고, 공학은 수학을 이용해 현실에 필요한 물건을 창조한다. 수학이 공학과 과학의 소통 언어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까지도 공학과 과학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다. 공학자는 물건을 만들어 내는데 필요한 지식이 없는 경우 스스로 찾기 위해 과학자가 되었다. 반대로 과학자도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실험 기구나 측정 장비를 직접 만드는 공학자가 되기도 하였다. 공학을 통해 만들어진 기계와 장비는 정밀하게 측정된 데이터를 과학에 다시 피드백하게 된다.
뉴턴은 천체를 관찰하기 위해 직접 망원경을 만들었다. 그리고 뉴턴의 일생일대 숙적이었던 로버트 훅은 현미경을 만들었다. 현미경이 없었다면 전염병을 신의 분노 혹은 귀신의 저주로 여기는 상황은 오랫동안 지속이 되었을 것이다. 빛의 굴절 특성이라는 동일한 과학 지식을 이용하지만, 뉴턴은 큰 것을 보는 장비를, 훅은 반대로 작은 것을 보는 장비를 만든 것이다. 이처럼 동일한 과학지식이 공학을 통해 반대 기능을 하는 물건으로 구현되기도 한다.
현대 과학의 특이점이 뉴턴의 프린키피아라면, 현대 공학의 특이점은 뉴커먼의 증기기관이다. 증기기관이 문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산업 혁명의 범위를 뛰어넘는다. 이는 무생물에서 동력을 만들어 내는 최초의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운동 에너지는 사람이나 가축의 생물학적 에너지가 전부였다. 풍력이나 수력은 극히 제한적으로 이용되었다. 하지만 증기기관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운동 에너지를 손쉽게 이용하게 된 것이다. 생태계에서 고등 다세포 생물이 진화하게 된 전제 조건은 에너지 대사 능력이다. 마찬가지로 증기기관을 통해 에너지의 자유로운 변환과 이용이 가능해지면서, 문명에서도 본격적인 사회구조의 진화가 시작되어 현대에 이르게 된다.
증기기관은 무생물에서 동력을 만들어 내는 최초의 발명품이다. 19세기 중반까지도 사용된 토마스 뉴커먼의 증기기관. https://www.lindahall.org/about/news/scientist-of-the-day/thomas-newcom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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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기술, 공학, 산업이 어우러지다
증기기관을 둘러싼 발전 과정은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공학의 특성을 잘 보여 준다. 새롭게 발명된 증기기관의 핵심 부품인 실린더는 강한 증기 압력을 버텨야 했고, 품질 좋은 철이 대량으로 필요했다. 영국은 철광석이 많이 매장되어 있어 제철 산업이 발전했었다. 하지만 철광석을 제련하는 데 필요한 높은 온도를 위해 숯을 사용했다. 나무를 벌목해 숯을 만드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고, 이는 제철 산업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영국에는 석탄도 풍부했지만, 잘 타지도 않고 유독 가스만 나오는 역청탄이 대부분이었다. 이 문제를 고민하던 한 철강회사는 구하기 어려운 숯 대신 널려 있는 역청탄을 이용할 궁리를 한다. 그리고 역청탄을 숯처럼 일차 가공해 코크스를 만들어내게 된다. 숯보다 뜨겁고 오래 타는 코크스의 발명 덕에 영국의 제철 산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석탄은 갑자기 귀중한 자원이 되고 이를 채취하는 광산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그러자 이번에는 질퍽한 석탄 광산에서 물을 퍼내기 위해 증기기관의 수요가 폭증하게 된다. 이는 다시 증기기관의 발전을 가져온다. 그리고 증기기관이 공장 위치에 상관없이 동력을 제공하기 시작하자, 도시에 직물 공장이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증기 기관의 힘을 통해 무시무시한 속도로 천을 짜는 자동 방직기가 발명되었기 때문이다. 양털을 이용한 모직물은 영국의 전통 수출 품목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자동 방직기로 일자리가 없어진 방직공들은 기계를 때려 부수는 러다이트 운동을 벌이기도 한다. 하지만 대세는 거스를 수 없었고, 이후 증기 기관은 고정된 위치를 벗어나 운송수단의 동력을 제공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선박, 배, 기차를 통해 교통혁명이 일어난다. 이처럼 증기기관을 만드는 공학과 관련 산업의 동시 다발적 상승작용은 영국을 순식간에 산업혁명의 중심에 위치시킨다. 증기기관을 둘러싸고 일어난 상승작용은 공학과 산업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증기기관을 중심에 두고 공학과 과학도 상호작용을 하며 진화하였다. 공학이 구현한 기술이 과학 지식을 진화시키고, 그 과학 지식은 다시 공학적 진화를 일으키는 선순환의 연결고리가 형성된 것이다. 증기기관의 효율을 올리기 위해 연구하는 과정에서 기체의 힘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기체의 움직임을 지배하는 원리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원자나 분자 같은 입자의 개념이 도입되었다. 이는 우주의 법칙이라 불리는 열역학 법칙으로 연결된다. 지금이야 화학 교과서의 첫 장을 채우는 지식들이만 당시에는 너무나 혁신적인 가설이었다. 보이지 않는 입자의 실체에 대해 많은 과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수학으로 설명되는 기체 방정식이 실제 증기기관의 실험 결과와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에 반박이 불가능했다.
과학적 증명과 공학적 증명은 다른 문제다. 공학에서는 만드는 것이 곧 증명이다. 현상을 잘 예측하는 수식만 있으면 증기기관의 효율을 개선하는 데 충분하였다. 그리고 기술이 더욱 발전함에 따라 실린더 안에서 직접 폭발을 일으켜 효율을 더욱 끌어올린 내연기관에 자리를 내어주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증기기관은 과학, 기술, 공학, 그리고 산업까지 포함된 인류의 지식 정보 생태계가 역동적 상호작용을 하며 자기 조직화되는 복잡계 창발 현상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제국주의와 함께 등장한 동인도회사는 현대 주식회사의 원형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동인도회사 본부. 위키미디어 코먼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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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출현, 모든 것이 자본으로
산업혁명의 생태계 조성에는 기업의 등장과 진화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학문에서 학파가 가설을 중심으로 형성된 학자들의 집단이라면, 회사는 특정 분야에서 이익을 중심으로 형성된 집단이다. 이익을 위해 모인 전문 집단의 역사는 뿌리가 깊다. 회사를 의미하는 company는 ‘같이(com) 빵(pene)을 먹는(ia)다’는 뜻이다. 한식구 또는 한솥밥을 먹는다는 회사에 대한 오래전 표현이 그대로 옮겨진 단어다. 회사의 시초는 고대부터 존재하던 무역상이나 협동조합인 길드다. 문명이 발전하기 위해 전문 직업의 세분화는 필수였다. 그리고 전문 직능의 대가를 더 많이 받으려면 집단을 형성해 협상력을 올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회사가 동반자의 의미가 강하다면, 기업은 전문화된 여러 구성 요소가 연결된 복합체의 의미가 강하다. 기업을 뜻하는 corporate는 인체를 의미하는 corps에서 나온 단어다. 따라서 기업은 사람처럼 각각이 완결된 하나의 유기체라는 의미를 가진다. 경제 참여 집단에 법적으로 사람의 인격권을 부여하는 법인도 이런 배경의 단어다. 단순한 이익 집단인 회사가 기업이라는 고도화 집단으로 탄생한 시초는 제국주의와 함께 등장한 동인도회사다. 사실 말이 좋아 회사지, 열강들이 식민지에서 최대의 이익을 뽑아먹기 위해 설립한 수탈 전문 집단으로, 사법권에 무력 군사 조직까지 지니고 있었다. 이중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현대 기업의 원형이다. 불확실한 미래 가치를 주식 상품으로 판매하는, 금융 자본주의가 도입된 최초의 주식회사이기 때문이다. 주식을 통해 기업은 은행의 지배를 벗어나고, 자본 소유와 경영이 완전 분리가 된다. 이는 양심의 가책은 최소로, 이익은 무한으로 추구 가능한 기발한 제도적 발명품이다. 자본을 소유한 사람에게 주식을 보유한 비율만큼만 책임이 분산되고, 경영을 하는 사람에게는 무한 자본 증식을 추구하는 것이 직업윤리가 되는 도덕적 방패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최초의 기업인 동인도회사들은 제국주의가 막을 내리며 모조리 소멸된다. 조직 폭력배의 이윤 구조를 가진 기업들이 깡패 짓을 못하게 되어 망한 것이다. 그리고 이차 세계 대전을 거치고 나서 세계 자본 시장이 형성되고, 여기서 이윤을 추구하는 현대적인 기업들이 등장해서 경쟁을 시작한다. 오랜 냉전의 여파로 우리나라에서는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의 상대 개념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이념이 아니라, 문명의 기본 경제 시스템이다. 그리고 자본 시장은 자본을 매개체로 형성되는 경제 생태계를 의미한다. 자본 시장에서의 자본은 교환 가치를 가진 화폐나 재산의 의미를 넘어, 돈을 벌기 위해 필요한 모든 기본 인프라를 의미한다. 토지, 설비, 임금, 등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투입되는 모든 요소를 자본이라 한다. 땅을 가진 사람은 땅이 자본이며, 돈이 많은 사람은 돈이 자본이다. 노동력은 노동자의 자본으로 이를 기업에 팔아 이윤을 취한다. 여기서 노동은 단순한 육체적 노동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전문 지식과 기술도 노동의 범위에 포함된다. 대학교수, 의사, 변호사도 월급을 받으면 지적 노동력을 자본 시장에 판매하는 노동자이다. 현대 금융 자본주의의 특징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것이다. 금융도 자본 상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월급을 받으면 노동자지만, 이를 주식에 투자하거나 은행에 저축하면 자본가가 된다.
자본은 세계를 하나로 만들었지만, 인간의 대응은 국가라는 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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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위기’라는 위협
2차대전 후 지속된 냉전은 자본시장의 통제에 대한 대결이었다. 국가가 자본시장을 통제하는 사회주의의 패배로 냉전은 막을 내리고, 자유 자본시장의 세계화가 진행된다. 그리고 이를 배경으로 과학기술과 공학이 폭발적으로 진화하게 된다. 자유 자본시장에서 기업 활동과 공학은 궁합이 잘 맞는다. 기업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이윤이 창출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장에서 팔 수 있는 새로운 상품을 계속 만들어야 하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공학이다. 세계화 시대에 공학이 해결 할 문제는 기업의 이익이다. 시장에서 잘 팔리는 상품을 만들 수 있는 기술과 공학이 더 많은 자본을 끌어들이고, 이는 관련된 과학 기술의 발전을 유도하게 된다. 금융자본주의에서는 이 상승작용에 브레이크가 없다. 이전 자본시장에서 통하던 ‘보이지 않는 손’이 닿지 않는, 미래의 불확실한 가치를 현재에 끌어오기 때문이다.
자본 시장의 세계화는 인류 문명의 급격한 발전을 견인해 왔다. 하지만 ‘우리’로 인식 가능한 집단의 최대 한계는 아직 국가 단계에 머물러 있다. 각국은 자국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무역 장벽은 세우면서, 동시에 자국 기업 상품은 세계 시장에서 자유롭게 팔기 원한다. 세계 시장에서 벌어지는 국가 단위의 자본 게임은 냉전 시대의 이념 전쟁보다 뜨겁다.
그리고 세계화에 가려진 국가 이기주의 문제는 코로나 팬데믹을 통해 적나라하게 표면에 드러났다. 세계화 시대에는 자본시장 뿐 아니라, 바이러스 숙주 집단도 통합된 것이다. 인종, 종교, 재산, 이념, 국적 등의 구분은 사람의 사정이고, 바이러스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한 감염의 숙주다. 하지만 이를 막기 위한 방역은 국가 단위로 이루어졌다.
의료와 방역이 취약한 국가에서 바이러스가 대량 증식하며 변이가 출현하고, 세계로 퍼져 나가는 과정이 수년간 반복되었다. 아무리 싸워봐야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단일종이라는 사실을 태고의 유전자 조각이 일깨워 준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정신없이 진행된 변화를 복기하고 미래의 방향을 고민하는 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요구되는 시대정신이다. 증기기관 발명을 계기로 시작된 화석연료의 무절제한 사용이, 기후 위기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와 인류 공동체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철현 | 울산의대 미생물학·의학교육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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