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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 (월)

정책 헛발질이 낳은 기아 사태… 전국을 피로 물들인 1946년 대구 10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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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조선일보

일러스트=한상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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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24군단 ‘군인들’이 주도한 미군정은 정무와 행정에서 여러모로 미숙했다. 대표적인 정책 실패가 미곡 정책이었다. 출범 직후인 1945년 10월 미군정은 ‘미곡의 자유시장’(일반고시 제1호)을 공포해 1943년 이후 총독부가 시행해 온 미곡의 공출‧배급제를 전면 폐지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하고 상식적인 정책이었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귀환 동포의 증대에 따른 수요가 격증한 데다 투기꾼의 매점매석이 겹치면서 쌀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결국 미군정은 1946년 1월 미곡수집령(법령 제45호)을 공포해 미곡의 강제 공출에 들어갔다. 그러나 공출 가격이 시장 가격의 20~30%에 그쳐 농민들의 원성과 반발을 샀다.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리던 ‘좌익의 성지’ 대구는 1946년 봄부터 어수선했다. 5월 콜레라가 창궐했고, 6월에는 홍수까지 덮쳤다. 방역을 위해 미군정이 교통을 차단하자 대구 시민들은 대부분 기아 상태에 빠졌고, 아사자가 속출했다. 극심한 혼란 속에서 9월 23일 ‘9월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조선공산당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주도한 ‘9월 총파업’에는 철도, 인쇄, 전기, 전보, 우체국 등 남한 전역에서 노동자 25만여 명이 동참했다. 대구에서도 ‘남조선 총파업 대구시 투쟁위원회’(시투)가 결성되었고 철도를 시작으로 우편국, 섬유공장, 조선중공업, 출판노조의 파업이 이어졌다.

1946년 10월 1일, 아침부터 노동자 수천 명이 대구역 인근 시투 본부 사무실 주위에 집결해 경찰과 대치했다. 대구부청에서는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시민 1000여 명이 몰려가 “쌀을 달라”고 외치며 부청의 현관과 유리창을 파괴했다. 오후에는 1만5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가 경계를 서고 있던 경찰 150여 명을 포위했다. 저녁 무렵 시위대가 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고, 선두에 선 경찰을 쇠몽둥이로 구타했다. 경찰 4명이 중상을 입고 후송되자,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위협사격을 개시했다. 그 과정에서 민간인 1명이 사살되었고, 1명이 중상을 입고 병원에 후송돼 이틀 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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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이 제작해 배포한 미곡 수집 협조 요청 전단. /국사편찬위원회


2일 오전 8시, 대구의대(현 경북대 의대) 학생회장 최무학은 수업 중이던 전교생을 강당에 불러 모았다. 연단 앞에 흰색 천으로 덮은 시신을 가리키며 “죄 없이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노동자의 시신이다. 이런 만행을 보고도 앉아서 공부만 하고 있다면 어떻게 피 끓는 조선의 젊은 지성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흰 마스크를 쓰고 의사 가운을 걸친 의대생 4명이 시신이 놓인 들것을 들고 교문을 나섰다.

시신을 뒤따르던 대구의대생 150여 명은 구호를 외치고 전단을 뿌리며 대구 중심가를 행진했다. 행렬이 대구경찰서에 다다랐을 때 학생, 노동자, 시민이 합류한 시위대는 1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시민 선동에 이용된 시신이 전날 경찰에게 사살된 시신이라는 증거는 전혀 없었다. 사건 수습 후, 당일 시위에 참여한 의대생 대부분은 그 시신이 대구의대에 보관 중이던 콜레라로 사망한 무연고 시신이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시위대는 대구경찰서 현관 앞에 시신을 내려두고 살인 경찰관 처단과 경찰의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권영석 경북경찰청장이 시위대를 향해 해산을 요구하는 연설을 했지만, 분노한 시위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젊은 경찰간부 신재석 경위가 경찰모를 벗어 던지고 “학생 여러분! 나도 여러분 편입니다. 이 순간부터 경찰복을 벗고 투쟁 대열에 동참하겠습니다. 인민공화국 만세!”라는 투항 연설을 하고 시위대에 합류했다. 시위대는 신재석에게 달려가 악수를 청하고 헹가래까지 쳐주었다.

시위대의 기세에 눌린 이성옥 대구경찰서장은 무력으로 시위대를 해산하라는 미군정의 명령에 항명하고, 자진해서 총기를 무기고에 넣고 경찰 병력을 인근 국민학교로 철수시켰다. 대구경찰서에 무혈 입성한 시위대는 유치장 수감자 100여 명을 석방하고, 무기고 문을 열어 무기를 탈취했다. 일부 시위대는 폭도로 돌변해 경찰, 우익인사, 기업인, 부호와 그 가족들을 총검으로 살해하고 관공서와 가옥을 점거하고 불을 질렀다.

오후 들어 미군은 시위 진압용 M-7 마운트 장갑차 4대와 기관총 부대를 투입했고, 충청도에서 지원 나온 경찰이 대구로 들어왔다. 오후 5시, 미군정이 계엄령을 선포하자 각 지서, 파출소를 떠났던 경찰들이 속속 복귀했다. 군중과 경찰 사이의 교전으로 이날 하루 동안에만 민간인 18명과 경찰 4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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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1일 대구 시위 발포 현장.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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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시위가 미군정에 의해 진압되자 시위 군중은 경북으로 진출해 각 군의 농민들과 합세했다. 달성, 칠곡, 고령, 성주, 김천, 영주, 영일 등 19개 군으로 파급된 경북 시위대는 10월 6일까지 대부분 진압되었다. 3일 구미경찰서를 습격해 점령함으로써 시작된 선산의 봉기도 6일 경기도에서 온 지원경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봉기를 주도한 선산군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사무국장 겸 선산인민위원회 내정부장 박상희는 도주하다가 경찰에게 사살됐다. 박상희의 아우 박정희는 17년 후 대통령에 취임하고, 사위 김종필은 25년 후 국무총리에 오른다.

경찰을 향한 시위대의 폭력은 잔혹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미군정 자료를 인용해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술했다. “대구의 군중(Mob)은 10월 6일까지 대구 경찰 38명을 살해했다. 그들은 단순히 살해된 것이 아니었다. 죽을 때까지 고문당하고 불태워졌으며 산 채로 피부가 벗겨졌다. 그들이 죽자 그들의 집과 가족이 공격받았다. 군중은 대구 전역에서 도지사를 포함한 공무원들의 집을 약탈했다. 그 뒤 미국인들은 안구가 도려지고 팔다리가 잘리고 수백 군데의 찔린 상처가 있는 경찰의 시신을 발견하고는 한국인의 야만성을 규탄했다.”(‘한국전쟁의 기원’)

대구에서 일어난 시위는 그해 12월까지 경상, 충청, 경기, 강원, 전남 등 남한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동학농민운동 이후 국내에서 일어난 최대의 농민 봉기였다. 죽창, 낫, 도끼, 경찰에게 탈취 무기를 지니고 공격하는 군중을 미군과 경찰이 장갑차, 소총, 기관총을 이용해 진압하는 과정에서 폭력 행위와 아무 관련이 없는 무고한 시민이 희생되기도 했다. 특별군정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30명 외에 88명의 민간인과 82명의 군경이 사망했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는 “대구 10월 사건의 일차적 책임은 민간인을 법적 절차 없이 임의로 살해한 현지 경찰에게 있다. 경찰의 행위를 관리‧감독해야 할 책임을 지닌 미군정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관련 법률은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대상을 민간인으로 한정 짓고 있기 때문에 군경 측 피해 사실은 조사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1′, 글항아리, 2023

이송순, ‘식민지기 조선의 식량관리제도와 해방 후 양곡관리제도의 비교’, 한국사학보 제32호, 2008

정영진, ‘폭풍의 10월’, 한길사, 1990

정해구, ‘10월인민항쟁 연구’, 열음사, 1988

진실화해위원회, ‘대구 10월 사건 관련 민간인 희생 사건’,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4권, 2010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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