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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2월27일 일본인 사진사 무라카미 덴신이 찍은 전봉준의 재판소 이송 직전 모습. 국가기록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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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남북접 동학군의 공주 점거투쟁
남접·호남 중심 농민전쟁론 넘어서기
지수걸 지음 l 역사비평사 l 3만2000원
1894년 11월, 동학군은 공주 우금티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하지만 최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해낼 수 없었고, 끝내 패하면서 서울 진격의 꿈은 무산되었다. 이에 대해 지수걸 공주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는 “남접·호남 중심 농민전쟁은 일제하의 민족해방운동, 또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일종의 혁명전통론”인 ‘농민전쟁론’이 만들어낸 낡은 분석방법이자 역사상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출간된 ‘1894년 남북접 동학군의 공주 점거투쟁’에서 지수걸 교수는 “19세기 후반 조선적 정치문화의 산물인 도회·의거(assembly/occupy, A/O)적 성격”에 주목하면서, 1894년 동학군의 공주 점거투쟁이 실상 “갑오변란과 청일전쟁 등으로 말미암아 크게 달라진 정세와 조건 가운데서 전개된 A/O투쟁”이라고 강조한다. 이는 남접을 이끌던 전봉준이 법정에서 심문에 답한 기록인 ‘전봉준 공초’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공주를 전격적으로 점거한 뒤 의려(義旅·자발적으로 모인 군사)를 규합하여 농성전을 벌이며, 일본군에게 격(檄: 大儀布告)을 전하며 정치담판을 벌이려 했다.”
남북접의 공주 점거투쟁은 관이나 사족 주도의 향회를 대신하여 “민 주도의 향회”를 조직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하여 도회(都會)라 칭함이 옳다. 도(都)자의 뜻, 즉 ‘도읍, 나라, 우두머리, 모두’라는 의미 그대로 “반상과 양천, 남녀와 노소를 구별하지 않고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함께 모여 춘추대의(春秋大義: 天下爲公)를 구현하는 방법을 논의하고 실천하는 일종의 공론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동학군의 1894년 공주 점거투쟁은, 특히 민중들이 도회와 의거 또는 광제창생과 보국안민의 주체로 부상하는 과정은 “역사의 흐름이 뒤바뀌는 대파국의 서막에 해당하는 사건”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그렇다면 남북접 동학군은 왜 서울 진격이 아닌 공주 점거에 한 달여 심혈을 기울였을까. 당시 공주는 충청감영 소재지로 호남의 관문이자 양호(兩湖), 즉 호서와 호남의 요충지였다. 나루를 건너거나 고개를 넘지 않으면 접근이 어려운 천연의 요새이기도 했다. 더더욱 호남 포교가 활발하던 1890년대 초반에는 최시형이 직접 머물며 포교 활동을 진두지휘한 ‘포교의 기지’로 그 상징성이 컸다. 남접과 북접의 연대 성사 배경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조선왕조 정부의 무능이었다. 일본 정부의 도움으로 대원군 체제를 종식시킨 “고종과 갑오·을미정권, 더 크게 말하면 조야 유생 모두의 지지와 방조 가운데” 동학군에 대한 강도 높은 탄압이 이어졌다. 위기 극복을 위한 남북접의 연대는 1894년 초 남접집단이 호남 단위에서 전개한 1차 봉기, 즉 전주성 점거투쟁의 성과에 기인한다. 동학군은 전주성에서 군중집회와 무장시위 등을 통해 대중적인 어셈블리, 즉 ‘모이고 모으기’ 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지도부는 전라감사, 초토사, 순변사 등을 상대로 나름의 정치협상과 담판도 벌였다. 호남 사람들의 지지와 성원이 그만큼 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갑오변란 이후 새롭게 조성된 정세와 조건 속에서” 남북접 지도부가 합의하면서 공동 대응책으로 내놓은 것이 공주 점거투쟁이다. 이후 전국 각지로 점거투쟁이 이어졌는데, 지은이는 이에 대해 “시대적 한계와 제약 내의 것이기는 하나 지배권력의 감시와 통제에서 벗어난 ‘자치와 자율의 공간’, 또는 지배권력의 자장 밖에서 민중이 서로 대화하고 소통하는 공간, 긍정적(능동적)으로 감응하여 서로 연대하고 협동하는 연계의 공간”이라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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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전쟁론을 따르자면 1894년 공주 점거투쟁 당시 남북접 동학군은 ‘농민군’ 혹은 ‘혁명군’으로 그 정체성이 제한된다. “반외세 반봉건, 즉 항일과 정권(왕조) 타도”가 그 투쟁목표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은이는 당시 동학군의 집단정체성을 동학의 종지(宗旨)인 ‘광제창생(廣濟蒼生),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실천하기 위한 “일종의 결사이자 집회 시위군중”으로 규정하며, 그들의 투쟁의 목표와 방법은 “19세기 후반의 도회·의거 전통에 의거한 전형적인 A/O투쟁”이라고 명토 박는다. 다만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한두 가지 요인도 있었다. 동학의 주문은 물론 각종 의식과 의례가 “어셈블리 투쟁의 힘이자 디딤돌”이 된 것은 분명하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공포의 정념이 민중들 사이에 확산되자 거꾸로 어셈블리 투쟁의 확산성을 제약하고 자신들을 스스로 고립시키는 짐이자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1894년 어셈블리는 “총칼 싸움만으로 승패가 갈리는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대의명분 싸움, 즉 말 싸움과 기 싸움이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장렬한 싸움을 통한 순교나 순국이 대의와 명분에 더 어울릴지 모른다. 다만 지은이는 대의와 명분을 어떤 관점에서 찾느냐가 중요하다고 본다. 즉 “순교나 순국 등 무엇인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가 아닌 “함께 모여 자신과 가족, 이웃과 친지(동무)들을 살리기”가 더 의미 있고 값진 투쟁이라고 남북접이 의견 일치를 본 것이다. 동학군은 무장봉기 초기부터 ‘불살생(不殺生) 불살물(不殺物)과 함께 “무엇을 위해서든 노부모와 처자식을 남겨둔 채 죽는 짓, 특히 순교나 순국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내용을 최고 강령으로 여겼다.
지은이는 다음과 같은 말로 책을 마무리한다. “1894년 어셈블리, 특히 신체와 신체의 마주침 과정에서 형성된 민중들의 긍정적 감응은 근대적인 의미의 인민(민중) 혹은 민족의 형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근대를 넘어서는 정치적 상상력의 보물창고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역사를 새롭게 쓰는 일은 언제나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1894년 남북접 동학군의 공주 점거투쟁’은 담대한 주장을 통해, 동학의 역사는 물론 우리 근현대사를 새롭게 읽자고 권하고 있다.
장동석 출판도시문화재단 사무처장,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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