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사람 부리는 데
정성 쏟던 대통령과
입장 다른 이야기
위로 전하던 옛 보좌관들
진짜 독립운동가와
진짜 민주투사들은
‘민주 잣대’ ‘親日 잣대’
함부로 휘두르지 않아
옛날이야기를 할 때나 들을 땐 항상 시대 변화를 감안해야 한다. 된장찌개가 99원 하던 시절과 1만원 하는 시절을 단순 비교하면 말 속에 담긴 뜻을 오해하게 된다. 도쿄에 상주(常駐)하는 미국 기자가 ‘일본 정치 담당 기자들은 자기들이 보고 듣고 아는 것의 3할밖에 쓰지 않아 신문만 봐선 일본 정치를 모르겠더라’고 했다. ‘미국은 어떠하냐’라고 묻자 ‘7할은 쓴다’고 했다. 나는 그들 사이 어디쯤 있을까. 기사로 쓴 것보다 쓰지 않고 가슴에 담은 것이 많은 건 사실이다. 이런 이야기들이다.
“국장 발령 받고 이틀쯤 됐을까. 청와대에서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어요. 무슨 건(件)으로 부르는지도 모르고 갔더니 대뜸 대통령 집무실로 데리고 가요. 잔뜩 움츠리고 있는 나에게 ‘장관 말이 임자가 일을 야물게 한다더군. 중요한 자리니 부탁하네’이러시는 거예요. 그러시면서 ‘집이 없다던데, 사람은 집이 있어야 일도 손에 잡혀…’ 하시면서 봉투를 손에 쥐여주셨어요. 독립문 근처에 방 두 칸짜리 한옥을 장만하는 비용의 3분의 1쯤 되는 돈이었어요.”
빈약한 국가 재정(財政)으론 모든 공무원의 처우를 개선하기 어려운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대통령은 돈이 들고나는 목을 지키는 그에게 이렇게 무언(無言)으로 ‘청렴’이라는 요구 사항을 전했다. 공무원 마음을 얻고 움직이려면 엄포가 아니라 정성이 있어야 한다. 그는 대통령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평(評)을 들었다.
으스스한 느낌은 조금 가셨지만 그래도 살벌한 시대였다. 아침 일찍 울린 전화벨 너머 목소리가 ‘대통령 민정수석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더니 ‘오늘이나 내일 낮 시간을 낼 수 있느냐’고 물었다. 목덜미가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혹시 무슨 일로…’ 하자 ‘만나서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회사에 나와 이력서를 들춰보니 육사를 졸업하고 평생을 정보부에서 지낸 ‘정보맨’이었다.
“대통령을 모시려면 제대로 모셔야겠고 그러려면 민심(民心)을 직접 들어야겠다 싶어 연락했어요. 당신은 고향도 우리와 다르고(그는 영남, 기자는 호남) 글도 삐딱하게 쓴다고 해 솔직한 말을 해주지 않을까 해서…”라며 수첩을 꺼냈다. 헤어질 때 말이 기억에 남는다. ‘대통령 관련 사항은 장담하지 못하지만 다른 사항은 빨리 실천할 겁니다.’ 그는 훗날 대통령 직선제 수용 선언과 ‘땡’ 하면 대통령 뉴스부터 전하던 KBS·MBC 행태를 바로잡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군사정권도 굴러가려면 이런 바퀴가 필요했다.
근육이 붙은 배우 유해진씨를 닮은 약간 험상궂은 청년이 편집국에 들어서더니 다가와 귀엣말을 했다. ‘’누구’를 모시는 비서입니다’라면서 메모지를 건넸다. 그 ‘누구’는 남영동(南營洞) 대공분실의 실상을 세상에 알린 인물로 ‘수배(手配)’와 ‘수배 해제’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당시는 수배 중이었다. 메모에는 ‘근처에 있는데, 시간 낼 수 있어…’라고 적혀있었다. 그는 정국(政局)이 언제나 풀릴지 궁금해했다. 훗날 몇 차례 국회의원을 지낸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일찍 세상을 떴다. 진보 진영에서 민주화 운동의 상징처럼 떠받들던 그가 생전에 ‘민주화’라는 잣대로 사람을 재던 일을 본 적이 없다. ‘진짜’는 어디가 달라도 달랐다.
독립운동가 이강훈(李康勳) 선생도 ‘진짜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보여주신 분이다. 청년 시절부터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1933년 체포돼 해방되던 날까지 감옥에 있었다. 독립운동가로서 최장기(最長期) 복역 기록이다. 훗날 진짜와 가짜 독립운동가를 가려내는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을 지냈다.
이 선생을 모신 어느 점심 자리 말석에서 들은 이야기다. “보통 사람은 일본 놈 척지고는 35년 식민지 통치를 버티기 힘들었어. 입신양명(立身揚名)하겠다고 일확천금(一攫千金)하겠다고 친일한 인간이 나쁜 놈들이지…. 잣대를 함부로 휘둘러서는 안 돼. 가장 악질이 독립운동 조직 속으로 파고든 일제(日帝) 밀정(密偵)들이야. 그놈들은 신분을 숨기고 감옥에까지 (독립운동가를) 따라왔어.”
‘진짜’가 귀해지고 ‘가짜’가 흘러넘치는 명절 밥상머리라서 그런지 진짜의 가치를 일깨워 주던 옛날 옛적 ‘진짜’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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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천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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