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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7 (화)

[큐레이터 김주원의 ‘요즘 미술’] '사물'이 말하고자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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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역사에서 '사물'은 작품이 제작된 시대와 인간 삶의 양태를 읽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예술가들은 왕왕 사물로 일상을 노래하거나 하나의 이야기처럼 재구성하기도 하였으며, 사물을 복잡하고 은밀한 상징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예컨대 시민계급의 성장과 무역업 등의 발달로 황금시대를 구가한 17세기 네덜란드의 '바니타스 정물화'나 이성의 굴레에서 벗어나길 꿈꾸었던 20세기 초 초현실주의자의 그림 속 '시계' 이미지, 그리고 1960년대 슈퍼마켓 진열장의 대량생산 '상품'(캠벨 수프 통조림)을 차용한 팝아트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사물들은 자신들의 시대가 마주한 실존의 음영을 말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2007년부터 줄곧 자신의 작업 모티프로 '사물'을 다뤄 온 작가 김현준의 <The light thing_비로소 있는 것> 연작(2023-2024)은 주목할 만하다. 김현준의 연작은 작가가 제주로 작업실을 옮긴 이래, 고의 또는 부주의로 해안가에 방치되거나 바다로 유입, 배출된 적지 않은 양의 쓰레기들을 보면서 생산-소비-폐기되는 상품의 사물화 과정을 주목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더불어 '소비'에 집중된 상품의 '가치' 문제가 기후 위기, 환경오염, 생태계 교란, 에너지 전환 같은 복잡한 문제들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지표임을 깨닫고,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여 버려진 쓰레기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아시아투데이

김현준 작품, The light things 폐플라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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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수집한 것들은 쓰레기이되 동시에 오랜 시간 파도에 쓸리고 바위 등 자연에 부딪히며 사물로 변형된 이형(異形) 사물들이다. 이 사물들은 전(全)지구적 산업화 이후 이른바 '인류세'로 지칭되는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특징적 위기를 잘 드러내고 있다. 잘 알다시피 인류세라는 명칭은 이전 지질시대와는 달리 인간이 '자연의 거대한 힘'이 되어버린 현상, 즉 인간이 만든 각종 산업 폐기물이 지층을 형성하여 팬데믹, 지구온난화, 기후위기 등을 초래했음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고자 제안되었다.

따라서 김현준이 수집한 사물들은, 대부분 대량생산을 전제로 한 기성품으로 찍어내거나 규격화된 사물들로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시스템이란 새로운 상품과 쓰레기를 동시에 양산하는 모순된 체제라는 어두운 진실을 상기시킨다. 유토피아적 전망에 근거한 이러한 모순은 인류세의 징후로서 쓰레기이자 변이되고 재구성된 새로운 사물을 양산하였다.

아시아투데이

김현준 작품, The light things 폐스티로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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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준의 <The light thing_비로소 있는 것> 연작들은 바로 이러한 모순을 배태한 새로운 사물들이며, 작가에 의해 발견되고 수집된 것들이다. 이들 사물은 스티로폼 혹은 왁스, 플라스틱 등의 산업 폐기물 파편, 프랑스산(産) 쿠키박스, 자동차 사이드 미러 등의 생활 폐기물, 부이(buoy, 浮標), 상품 적재용 나무 팰릿, 유목 등의 어업용 폐자재이거나 따개비, 산호초, 해초 등의 바다 동식물이 이들 폐기물에 달라붙어 화석화된 것들이다. 그러고 보면 작가가 주워 수집한 사물들은 특정한 공간과 장소에서 생산과 소비라는 시스템으로부터 버려져, 전혀 다른 시공간인 바닷속, 해안가 등에 방치되고 부딪치며 떠돌아다니다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들은 상품으로서의 정보는 지워진 채 재료적 물성이 강화되거나 때론 폐사된 해양 동식물과 폐자재의 이질적인 물성이 융합된 섬뜩하고 낯선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물성이 강조된 오브제들은 일반적으로 촉각적 욕망을 자극하지만, 처음 보는 섬뜩함과 낯섦은 물성이 지닌 내러티브 이상의 불길한 부조리극, 명백함을 넘어 자폐적 복잡성이 강조되고 있다. 그렇기에 오브제 특유의 촉각성보다는 시각에 우선권을 부여하는 아이러니를 보인다.

작가는 이들 재구성된 사물 혹은 새롭게 변이된 사물에 그 어떤 조각적 개입도 하지 않았다. 즉 만들기를 포기하고 자신이 수집한 사물에 LED(발광다이오드)를 심는 최소한의 개입만을 했다. LED 빛은 사물의 깨진 틈 사이 남아있는 정보·흔적들을 주목하면서 이 새로운 사물의 신체, 즉 이형 사물이 본래 탄생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일상에서 소비되고 버려진 사물의 파편, 재구성된 사물임을 환기하고 있다.

김현준의 신작 <The light thing_비로소 있는 것>은 '사물'을 둘러싼 환상이 끝없는 진보라는 유토피아적 환상, 가장 새로운 것이 더욱 가치 있는 것이라는 환상과 동일한 것임을 경계하면서, 생산-소비-폐기의 가속화된 자본주의 소비사회 시스템 속에서 존재하는 것과 소멸하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질문하고 있다.

/큐레이터·상명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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