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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7 (화)

러·우크라는 같은 나라? 푸틴의 꿈은 이미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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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출신 역사학자인 저자… 키이우 루스부터 당대사까지 분석

조선일보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세르히 플로히 지음 | 이종민 옮김 | 글항아리 | 568쪽 | 3만2000원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한 러시아군이 수도 키이우로 물밀듯이 진격했을 때, 전쟁이 오래 가리라 예상한 이들은 적어도 우크라이나 밖에서는 거의 없었다. 러시아 병사들의 전투식량은 2~3일분뿐이었고, 일부는 키이우 중심가에서 승리의 행진을 벌이기 위해 열병식용 제복을 입고 있었다.

불과 닷새 전 뮌헨안보회의에 참석한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에게 일부 서방 지도자는 “돌아가지 말고 망명정부를 수립하라”고 조언했다. 젤렌스키의 대답은 이랬다. “아침을 우크라이나에서 먹고 왔으니 저녁도 우크라이나에서 먹겠다.” 며칠 만에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은 2년 반 넘게 계속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군은 유린당한 영토 상당 부분을 되찾고 일부 전선에선 러시아 영토로 진입했다.

이 책(원제 The Russo-Ukrainian War)의 저자는 우크라이나 출신 역사학자로 미국 하버드대 교수다. 전면전 발발 소식을 듣고 고통과 분노에 휩싸였던 그는 주변의 권고로 개전 이듬해까지 경과를 담은 이 당대사(當代史)를 집필해 지난해 영국에서 출간했다. 책 중간에야 2022년 2월의 상황이 등장할 정도로 ‘도대체 왜 이 전쟁이 일어났나’라는 분석을 자세히 기술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 서기 10~13세기의 중세 국가 ‘키이우 루스’를 역사적 원형으로 인식하고 있다. 러시아에선 러시아·우크라이나가 동슬라브족과 동방 정교 같은 공통분모를 가졌다고 강조하지만 우크라이나는 ‘키이우 루스는 다민족 국가였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언어·문화가 달랐다’고 본다.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우크라이나에선 19세기에 독자적 민족주의가 발흥했다.

1917년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자 우크라이나는 공화국을 세웠으며,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이 됐다. 1991년 우크라이나인들은 국민투표를 통해 소련에서 벗어나는 독립을 압도적으로 지지해 소련 해체를 가속화했다. 이때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고르바초프와 옐친을 비롯한 소련 내 정치 지도자 누구도 유혈 사태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004년의 ‘오렌지 혁명’ 등으로 민주화를 이뤄 가던 우크라이나와는 달리 러시아에선 ‘유라시아주의’나 ‘대(大)러시아’ 같은 국수주의적 사상이 횡행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는 원래 같은 민족이었으므로 재통합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 주창자 중 한 명은 과거 소련의 반체제 작가였던 솔제니친이었다. 문제는 러시아 대통령 푸틴이 이 사이비 이론을 신봉했다는 데 있다.

러시아가 자신을 가만 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던 우크라이나는 소련 해체 당시 자국 영토 안에 있던 막대한 물량의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EU에 가입해 보호막을 치려 했으나 실패했고 오히려 러시아를 자극했다. 결정적으로 2014년 우크라이나의 권력 공백 상태에서 러시아는 신속하게 남쪽 크림 반도를 병합하고 동쪽 돈바스를 침공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사실 이때 시작된 것이었지만 서방은 마치 제2차 세계대전 직전 히틀러를 관망했던 것처럼 ‘푸틴이 저러다 말겠지’라고 심드렁하게 여겼다. 2022년 전면전은 세계를 놀라게 했지만 간과된 것이 있었다. 그 8년 동안 우크라이나는 방어력과 전술 능력을 강화하는 내실을 갖췄다는 사실이다. 젤렌스키는 의외의 리더십을 발휘했고 우크라이나 민군(民軍)은 끈질긴 저항을 벌였다.

이제 푸틴의 계획은 좌절됐다. 러시아군은 이른바 ‘동족’이라는 우크라이나인들을 곳곳에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오히려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가 강화됐으며 서방과의 관계도 밀접해졌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극도로 우려했던 러시아는 지난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인접한 핀란드가 나토의 일원이 되자 뒤통수를 맞는 모양새가 됐다.

전쟁이 진행 중이라선지 책의 논지는 뒤로 갈수록 모호해지지만, 저자는 이 말을 꼭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초강대국을 중심으로 두 진영으로 나뉘는 세계의 양극화를 초래하고 있다. 반면 러시아는 예전 중국이 그랬던 것처럼 ‘더 가난하고 더 무모한 동맹의 일원’이 되는 역할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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