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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 (일)

‘대학 자치’ 주장한 서울대 교수들, 월북해 김일성대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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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경성대학 등 통합하자 좌익 소요 ‘국대안 파동’

조선일보

일러스트=한상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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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일본의 여섯 번째 제국대학으로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은 매년 50명 내외 한국인의 입학을 허용했다. 1945년 폐교될 때까지 한국인 졸업생은 다 합쳐도 800여 명에 불과했다. 역대 재직 교수 275명 중 조선인은 고작 4명이었고, 그나마도 폐교를 1년 앞두고 임용된 의학, 이공학 전공자였다. 해방과 함께 조선 유일의 대학이던 경성제대는 기능이 마비되었다. 일본인 교수와 학생은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고, 얼마 안 되는 한국인 조수, 학생, 직원, 동문이 ‘경성대학 자치위원회’를 결성해 학교 시설을 보호하고 재건을 도모했다.

전문 직업인 양성을 위해 설립된 관‧공립 9개교, 사립 전문학교 11개교도 사실상 ‘대학 기능’을 수행했지만, 초엘리트 지도자를 양성하는 제국대학보다 ‘아래’로 취급되었다. 해방 당시 관‧공립 전문학교 9개교의 보유 장서가 5만권도 채 안 되었지만, 학생이 수백명에 불과한 경성제대는 60만~70만권의 장서를 보유했다.

1945년 9월, 대학 행정 사무를 접수한 미군정은 학교 명칭을 ‘경성대학’으로 변경했다. 곧이어 총장 대행 겸 법문학부장에 예일대 박사로 연희전문 교수로 재직했던 백낙준, 예과부장에 와세다대 출신으로 보성전문(현 고려대) 교수로 재직했던 현상윤을 임명했다. 경성대학 자치위원회는 두 사람의 학부장 임용에 거세게 반발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들의 ‘친일 이력’이었지만, 그 기저에는 “비(非)제국대학 출신 ‘외부인’이 대학을 접수하려는 시도”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게 작용했다. 결국 몇 달 후 백낙준은 연희전문 교장, 현상윤은 보성전문 교장으로 이직했다.

미군정은 식민지 교육 청산을 위해 경성대학의 우월적인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관‧공립 전문학교와의 통합을 추진했다. 그 첫 번째 시도가 1946년 4월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의학전문학교의 통합이었다. 하지만 경성대학은 “최고 엘리트를 양성하는 대학의 의학부를 전문학교와 통합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경성의전은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경의전을 다른 학교와 통합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통합에 반대했다.

1946년 7월, 미군정 문교부는 경성대학과 경성경제전문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경성사범학교 등 8개 관‧공립 전문학교, 사립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등 10개 학교를 통합하여 대학원과 9개 단과대학으로 구성된 ‘거대한 종합대학’을 설립한다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국대안)’을 발표했다. 석 달 전 의대 통합 때 예견된 것처럼 경성대학은 물론 전문학교 9개교의 교수, 학생 모두 국대안에 거세게 반발했다.

대학 구성원과 협의 없이 미군정 당국의 일방적 의사만으로 통합이 결정된 것, 10개교를 하나로 합치는 만큼 교육 기회가 축소될 우려가 있다는 것, 국립대학 설치와 같은 중차대한 과업은 미군정이 아니라 통일 정부가 추진해야 할 문제라는 것 등 수많은 반대 이유가 제시되었지만, 가장 핵심적 반대 이유는 행정 관료만으로 구성된 ‘이사회’가 인사와 재정 등 대학 운영의 최종적 결정권을 갖는 것이었다. 이사회에 의한 대학 운영은 미국식 대학 제도에서는 일반적이었지만, ‘교수회의’가 학장, 학부장, 교수의 인사권과 대학 운영의 주요 결정권을 갖는 일본 제국대학의 ‘교수 자치’ ‘대학 자치’ 관행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조선일보

1947년 3월 12일자 '민보'라는 신문에 실린 시사만화 '국대안 후문'. 국대안 반대 동맹휴학으로 텅빈 교실을 풍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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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식 이사회 도입에 제국대학 출신 ‘조선공산당(조공)’ 계열의 좌익 교수들이 특히 반발했다. 도호쿠제국대학 물리학과 출신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수 한인석은 “일본과 같은 비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대학을 관료의 손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방어선으로써 교수자치권은 인정되었다”는 논리로 국대안을 비판했다. 의혹과 불신 속에 국대안 반대 여론이 고조되는 가운데 8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법령 제102호)이 공표되었다. 법령에 따라 이사회가 미군정 문교부 고위 관리들로 구성되었고, 총장에 법학박사 앤스테드 ‘대위’가 임명되었다.

조선인민보, 독립신보 등 좌익 언론, 민주주의민족전선, 문화단체총연맹, 과학자동맹, 조선교육자협회 등 조공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좌익 단체가 국대안 반대 운동을 주도했다. 조공은 교수로 재직 중인 당원을 통해 국대안 반대 운동을 ‘반(反)미군정 투쟁’으로 확대했다. 국립대 참여 거부 운동을 주도한 경성경제전문 교수 박시형과 경성사범 교수 김석형은 ‘교수 226명의 사퇴 의사’를 받아내 미군정을 위협하는 혁혁한 성과를 올렸다. 이후 그들이 월북해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로 임용돼 제출한 이력서에는 “조공 푸락취”라는 경력이 ‘당당히’ 기술돼 있다.

미군정 장교의 증언처럼 “불행하게도 가장 역량 있는 교수들이 좌익 사상가였으므로 학생들도 자연스럽게 그들과 공감”했다. 9월 개학이 되자, 국대안을 반대하는 집단행동이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학생들은 등록을 거부하고 친일 교수 배격, 경찰의 학원 간섭 중지, 국립대 행정권 일체를 조선인에게 이양할 것, 미국인 총장을 한국인으로 대체할 것 등을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서울대로 통합될 10개교는 물론 사립 전문학교, 일부 중학교, 심지어 일부 국민학생까지 동조 동맹휴학에 나섰다. 동맹휴학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참가한 학교 수가 57개교, 학생은 연인원 4만여 명에 달했다. 미군정 문교부는 휴교, 제명, 해직 처분으로 강경하게 대응했다. 신학기가 시작되는 1947년 3월, 서울대학교 9개 단과대학 8040여 명 중 4956명(61%)의 학생이 제명된 상태였고, 429명의 교수 가운데 380여 명(88%)이 서울대 참여를 거부했다.

5월, 미군정 문교부는 이사진을 9명의 한국인만으로 구성하고, 총장도 한국인 이춘호로 교체했다. 제적된 교수와 학생에 대해 심사를 거쳐 조건부 복직과 복교를 허용하는 수준에서 국대안 사태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어정쩡한 타협은 이후 한국 대학 교육에 나쁜 선례를 남겼다. 제적된 학생들은 최소 한 학기 이상 출석도 공부도 하지 않았지만, 형식적인 필답고사를 치르고 재입학과 진급을 허용했다. 미군정 미국인 고문은 “세계 어느 대학에서도 공부하지 않은 학생에게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주는 경우는 없다”고 경고했다.

대학 자치를 실현하려다 좌절한 서울대 교수 상당수는 월북해 김일성대 창설의 주역이 되었다. 도상록(양자물리학), 이승기(화공학), 한인석(물리학), 이재곤(수학) 등 북으로 초빙되거나 월북한 교수들은 제국대학 출신들로 독특한 학연으로 맺어졌으며, 조공 당원으로 국대안 반대 운동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인물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또한 대학 자치를 요구하며 서울대를 사임했지만, 정작 이직한 김일성대에서는 대학 자치를 한 번도 요구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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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해방 후 서울대 문리대 건물로 사용되다가 1975년 관악캠퍼스 이전 후 그 자리에 마로니에공원이 조성됐다. /서울대학교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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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김기석, ‘일란성 쌍생아의 탄생, 1946: 국립서울대학교와 김일성종합대학의 창설’, 교육과학사, 2001

아마노 이쿠오, ‘제국대학’, 산처럼, 2002

이지완, ‘국대안 파동과 민주주의 교육’, 역사와 현실, 제132집, 2024

정종현, ‘제국대학의 조센징’, 휴머니스트, 2019

편찬위원회, ‘서울대학교 70년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하성환, ‘국대안 사건의 교육사적 함의’, 뉴 래디컬 리뷰 제69호, 2016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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