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멘터리
브랜드에도 걸음걸이가 있다고 하죠. 이미지와 로고로 구성된 어떤 브랜드가 사람들에게 각인되기까지, 브랜드는 치열하게 ‘자기다움’을 직조합니다. 덕분에 브랜드는 선택하는 것만으로 취향이나 개성을 표현하고, 욕망을 반영하며, 가치관을 담을 수 있는 기호가 됐죠. 비크닉이 오늘날 중요한 소비 기호가 된 브랜드를 탐구합니다.
명절 인기 선물 아이템으로 자리매김한 스팸 선물세트. 사진 CJ제일제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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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추석 연휴가 시작됐습니다. 명절에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선물이죠. 이번 추석에 여러분은 어떤 선물을 주고받으셨나요?
시대별 명절 선물을 보면 당시 경제 수준을 엿볼 수 있어요. 한국 전쟁 이후 어려웠던 시기엔 쌀·계란 등 농산물을 선물로 주고받았고, 산업화 이후 살림살이가 조금 나아지면서 커피나 치약 등 기호품이 인기였죠. 그리고 지금은 건강식품부터 술까지 다양해졌습니다.
그런데 90년대부터 지금까지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변함없이 명절 대표 선물로 자리매김한 상품이 있습니다. 바로 스팸이죠. 저렴한데 누구나 먹기 편하고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장점 덕분에 스팸 판매량의 51%가 선물세트에서 나온다고 합니다(2023년 기준).
세계 2차대전 때 군인 식량으로 보급된 이 통조림은 한 세기가 흘러 어떻게 한국의 ‘명절템’이 됐을까요. 오늘 비크닉은 스팸의 탄생과 진화의 과정을 자세히 다뤄봅니다.
2차 세계대전 때 스팸은 전투 식량으로 보급됐다. 사진 호멜 식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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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만들고 키운 조미햄
미국 오스틴에 뿌리를 둔 정육 업체 ‘호멜 식품’ 창업자의 아들 제이 호멜은 1937년, 처치 곤란한 고기를 갈고 조미료를 첨가해 통조림을 만듭니다. 1차 세계대전 때 장교로 일하며 가공육 전투식량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죠.
초창기 스팸의 이름은 ‘호멜 조미햄’이었어요. 하지만 평범한 이름 탓에 인기가 없었죠. 그러자 호멜은 상금 100달러를 걸로 이름 공모전을 엽니다. 여기서 뽑힌 ‘SPAM’은 조미된 햄을 뜻하는 ‘spiced ham’의 축약이죠. 단순한 이름과 노랑과 파랑으로 구성된 눈에 띄는 디자인 덕분에 스팸은 소비자의 눈길을 단숨에 사로잡았습니다.
미국의 전설적인 코미디 듀오인 조지 번즈(위 왼쪽)와 그의 아내 그레이시 앨런을 모델로 한 광고. 사진 fli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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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는 말이 있죠. 호멜 식품엔 때아닌 운이 찾아옵니다. 1939년 발발한 2차 세계대전에 스팸이 군인 전투식량으로 보급되면서죠. 당시 스팸 1억 파운드(약 4500만㎏) 이상이 유럽과 대서양으로 보내졌다고 해요.
전성기를 맞았지만 호멜 식품은 언젠가 끝날 전쟁 이후를 대비해 공격적인 광고 마케팅 펼칩니다. 1940년부터 라디오에 ‘아침∙점심∙저녁, 심지어 간식으로 먹어도 좋은 스팸’이라는 메시지를 송출하는가 하면, 같은 해 미국의 전설적인 코미디 듀오인 조지 번즈와 그의 아내 그레이시 앨런을 모델로 한 광고도 내보내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호멜 식품은 1940년 스팸 활용법 50여 가지를 담은 20쪽짜리 요리책도 만들었죠.
2차 세계대전 이후 호멜사는 여성공연단 호멜걸스'를 구성해 스팸 마케팅에 나선다. 사진 호멜 식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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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멜은 어쩌면 ‘브랜드 애착(Brand attachment)’을 직관적으로 이해한 듯합니다. 브랜드 애착이란 소비자와 브랜드 사이에서 형성되는 유대감을 뜻하는 마케팅 용어인데요, 애착이 형성되려면 충분한 시간과 직접적인 상호작용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독창적인 브랜드 경험이 중요한데, 회사는 끊임없는 화제몰이로 이를 실현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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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아이돌 마케팅…걸그룹 ‘호멜걸스’의 탄생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스팸은 내수 시장으로 눈을 돌립니다. 광고로 쌓은 좋은 이미지에 ‘애국 코드’를 더합니다. 이것이 걸그룹 ‘호멜걸스’가 탄생한 배경입니다.
1946년 호멜 식품은 전쟁에 참전한 여성 음악가 60여 명을 모아 공연단을 만듭니다. 음악은 물론이고 코미디 공연도 하죠. 단원 대부분 미혼 백인 여성이었다고 해요. 호멜걸스는 지역 마트나 가정 방문을 통해 스팸 홍보도 진행하고, 일요일 저녁마다 전국에 송출되는 인기 라디오쇼에 출연하기도 했죠. 걸그룹을 통한 애국 이미지 메이킹은 엄청난 효과를 일으킵니다. 1950년엔 10억개의 스팸을 생산할 정도였죠.
영국 방송사 BBC는 2013년 한국의 스팸 소비 문화를 조명하는 프로그래믈 제작했다. 사진 BBC 영상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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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하나 더, 브랜드에 충성도 높은 고객들을 위해 커뮤니티를 만들어가기도 해요. 미국 텍사스에서 열리는 스팸 덕후들의 축제인 ‘스패마라마(spamarama)’를 후원하고, 스팸 박물관 설립, 스팸 레시피 콘테스트, 뮤지컬 제작까지, 소비자와 연결될 다양한 기회를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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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 편지에도 담겼다…미국인이 스팸 싫어하는 이유
하지만 스팸이 좋은 이미지만 갖는 건 아닙니다. 미국인들은 스팸에 대해 자국을 대표하는 상품으로서 자부심을 갖지만, 하층민을 위한 싸구려 음식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도 갖죠. 1990년대부터 통조림 캔이 가난한 사람에게 기부되면서 생긴 이미지예요.
이와 관련한 유명한 일화가 있죠. 2차 세계대전을 대표하는 사령관이자 미국 34대 대통령인 아이젠하워가 호멜 식품 창립 75주년을 기념해서 이런 편지를 보냈답니다.
" 수백만 명의 군인과 스팸을 먹었습니다…(중략) 전직 총사령관으로서 공식적으로 당신의 유일한 죄를 용서합니다. 우리에게 너무 많은 스팸을 보낸 것을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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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팸 선물세트에 놀란 외국인…외신도 총출동
이런 이유로 미국인들은 한국인의 스팸 사랑을 흥미롭게 바라봅니다. 10년 전 뉴욕타임스와 BBC는 한국의 스팸 소비를 조명했어요. 한국에서 명절 기간 스팸을 예쁘게 포장해 소중하게 주고받는 모습이 놀라웠던 거죠.
1987년 국내에 선보인 스팸 첫 광고. 사진 CJ제일제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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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들이 다룬 기사·방송을 보면 스팸이 국내에 소개된 과정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 중 음식이 귀했던 시절, 미군이 들여온 스팸은 귀하게 여겨졌죠. 당시 미군과 연줄이 있는 부유층이나 스팸을 즐길 수 있었고, 스팸 거래 암시장도 생길 정도였으니까요. ‘스팸=고급 음식’이라는 이미지를 갖게 된 겁니다. 그때 탄생한 ‘부대찌개’는 한국인의 별미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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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밥에 스팸 한 조각’이 나오기까지
한국에 스팸이 정식으로 들어온 건 1986년 CJ제일제당을 통해서입니다. CJ제일제당은 호멜 식품과 라이센스 계약을 맺고, 국내에서 생산을 본격화합니다. 빠른 경제 성장을 일군 한국이 이제는 직접 스팸을 만드는 나라가 됐다고 홍보했죠. 1987년 5월 처음 스팸이 나온 이래 생산량만 연간 500톤. 가공육 시장 1위를 차지합니다. 1987년 70억원이던 매출은 97년엔 520억원으로 10년 만에 7배 증가했어요.
'따뜻한 밥에 스팸 한 조각' 광고로 스팸은 한국에서도 통조림 햄의 대명사가 됐다. 사진 CJ제일제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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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부터는 대형마트의 선물세트가 일반화하면서 스팸도 이 시장에 뛰어듭니다. 고급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다 보니 단숨에 인기 선물이 됐죠.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소비층 확장을 위해 국민 반찬 이미지도 만들었습니다. ‘따뜻한 밥에 스팸 한 조각’이라는 문구를 쓰면서요. 덕분에 2020년 이후에도 연평균 6%씩 성장해서 지난해 매출은 약 5400억원을 기록했다고 해요. 올해 상반기까지 누적 판매량은 20억7000만개래요. 단순하게 계산하면 지금까지 국민 한 명당 스팸 40캔 정도 먹은 꼴이죠.
2017년 스팸을 이름에 넣어 개명한 마크 베슨의 결혼식. 사진 호멜 식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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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젊은 세대를 겨냥한 마케팅에 힘 쏟고 있습니다. 간편하게 먹는 동그란 스팸을 내는가 하면 저칼로리 트렌드에 맞춰 닭가슴살 스팸도 냈죠. 이영은 원광대 교수(식품영양학)는 “올해 외식 산업 키워드는 ‘공존’인데, 스팸은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의 취향을 이해하는 ‘할매니얼’ 트렌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상품”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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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의 이름까지 바꾸다...장수 브랜드의 비결은 찐 팬 확보
스팸과 관련된 또 다른 일화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지난 2017년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열린 한 결혼식은 세간의 주목을 받습니다. 신랑 이름이 ‘마크 나는 스팸을 사랑하는 벤슨(Mark I Love Spam Benson)’이었기 때문이죠. 그는 스팸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이름까지 바꿨습니다. 결혼식은 스팸 박물관에서 진행됐고, 신혼여행 역시 미국에서 가장 많이 스팸을 소비하는 하와이에서 보냈다고 해요. 그곳에서 열리는 스팸 축제에서 축하를 받기 위해서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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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 벤슨처럼 여러분도 한 브랜드에 열정적으로 빠져본 적이 있나요. 오래된 브랜드가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는 소비자와 상호작용하기 위한 끝없는 노력 덕분 아닐까요. 스팸은 2년 뒤 탄생 90주년을 맞이합니다. 사람 나이로 따지면 구순의 노인이죠. 스팸은 앞으로 또 어떤 재미난 일을 벌일까요. ‘스팸 벤슨’ 같은 또 다른 에피소드가 생길지 기대가 됩니다.
‘비크닉’ 유튜브 채널의 ‘B사이드’에선 스팸의 역사와 트렌드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봅니다. 음모론적인 질문으로 브랜드의 의도를 파헤쳐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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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혜빈 기자 seo.hyebin@joongang.co.kr, 유충민·장우린PD, 노영주·이지수 인턴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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