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카와 등판에 일부 팬 댓글 공격
구단, 시라카와 선발순서 바꿔
이는 특정 선수의 인종·국적·성별을 문제 삼아 경기 출장을 막거나 반대하는 차별 행위에 해당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국제 스포츠계에서는 이같은 차별을 엄격히 반대하고 있다. 국내 팬들도 “광복절이라고 일본인 투수 등판을 반대하는 건 차별이자 무지한 행위”라는 주장을 냈지만 해당 게시물엔 “생각이 있으면 광복절에 시라카와는 빼라”, “문제를 못느낀다면 친일파 꿈나무” 등 노골적인 차별성 댓글이 계속 이어졌다. 심지어 두산 일본인 코치 고토 코지를 향해 ‘광복절에 시리카와랑 고토 코치는 경기에 나오지 마라’는 댓글도 있었다.
일본에선 지난 2014년 J리그 구단 우라와 레즈 팬들이 재일교포 4세 선수 이충성과 윤정환 당시 사간도스 감독 등 한국인을 겨냥해 ‘재패니즈 온리(Japanese Only)’라는 차별성 문구를 쓴 현수막을 내걸자 일본축구협회가 사상 첫 무관중 경기 징계를 내렸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도 “심히 유감스럽다”고 입장을 내기도 했다.
광복절과 3.1절 등을 빌미로 일본인, 일본 문화 등을 문제 삼아 네티즌들이 몰려다니며 비난과 악플을 퍼붓는 맹목적 반일 차별주의가 한국 사회에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있다. 과거 정치인, 연예인을 겨냥한 ‘반일 사이버폭력’이 이제는 정치와 무관한 영역으로 여겨진 스포츠 영역으로까지 퍼지고 있는 것이다. 시사평론가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은 “과거 정치인을 겨냥했던 반일 몰이를 그대로 답습한 차별·공격 행위가 이제 스포츠, 심지어 일반인을 겨냥해서도 확산되고 있다”며 “역사 의식 등을 내세우며 일본과 관련된 게 있다면 무엇이든 빌미로 삼아 공격하고 물어뜯는 사이버 폭력과 차별 행위가 일종의 밈(인터넷 유행)처럼 퍼지는게 특히 우려스러운 부분”이라고 말했다.
과거엔 이렇지 않았다. 2009년 광복절에 SK(SSG 전신) 일본인 투수 가도쿠라 겐이 선발 등판했고, 2010년 광복절엔 당시 LG 소속 일본인 투수 오카모토 신야가 구원 투수로 등판한 바 있다. 타 구단 관계자는 “갑자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시라카와는 일본 독립리그에서 뛰다가 한국으로 건너왔다. “한국에 와서 행복하다”면서 한국 문화에 친근한 모습을 자주 보였고 ‘감자’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두산은 시라카와가 상대(롯데)에 약해서 등판을 취소했다고 했지만 그는 이전엔 난타당했던 LG전에 거듭 등판한 적이 있다. “약하다는 판단이 그때그때 다르다”는 비아냥이 들리는 이유다. 더구나 약하다는 상대(롯데) 성적은 이전 소속팀(SSG) 때 얘기. 두산에 와서는 상대한 적도 없다. 이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런 식으로 (선발 순서를) 운영하는 구단은 아마 없을 것”이라는 반응이다.
두산 구단은 15일 잠실구장에 걸려 있던 일장기도 내렸다. 대부분 프로야구 구단들은 소속팀 외국인 선수를 예우하는 차원에서 해당 국가 국기들을 구장에 건다. 두산도 20여 년째 그 관행을 지켰다. 그런데 이번에 일부에서 “광복절에 일장기를 게양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항의하자 이를 받아들였다. 두산도 처음엔 “‘정치와 스포츠를 별개로 봐야 한다’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원칙에 따라 일장기를 그대로 둔다”고 했지만, 이튿날엔 “태극기를 제외한 모든 국기는 내리기로 했다”고 말을 바꿨다.
두산 관계자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시라카와가 최근 등판 내용이 좋았다면 로테이션 순서를 지켰을 것”이라며 “정규 시즌이 40여 경기 정도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총력전을 하고 있다. 13일 경기가 우천 취소되면서 로테이션을 조정할 여유가 생겼고 최원준은 잠실에서 강하고 시라카와는 KT에 강해서 선발 로테이션을 조정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광복절 경기 전 일장기를 내린 것에 대해서는 “팬들의 지적을 수용한 게 맞다”며 “일장기만 내린 건 아니고 다른 외국인 선수들의 국기(캐나다, 미국)도 다 내렸다”고 밝혔다. 한국야구위원회(KBO) 관계자는 “해당 구단이 전략적 이유로 선수 기용을 판단했다고 하면 차별로 보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로선 마땅히 할 수 있는 조치가 없다”고 말했다.
이런 일이 해외에서 벌어졌다면 인종차별 논란으로 번질 수 있다. 지난 2021년 손흥민을 향해 일부 영국 팬들이 소셜미디어에서 “집에 돌아가서 개고기나 먹어라” “작은 눈의 황인종” “중국 연기 대상감” 등 혐오 발언을 쏟아낸 것이나, 스페인에서 레알 마드리드 공격수 비니시우스 주니오르를 향해 ‘원숭이’ 등 혐오 발언을 한 행위나 크게 다를 것 없다는 의견이다.
해외 스포츠 협회들은 이런 행위에 대해 다양하고 엄격한 징계를 내린다. 영국 경찰은 손흥민에게 혐오 발언을 SNS에서 적은 가해자 12명을 찾아 조사해 손흥민에게 직접 사과 편지를 쓰도록 하는 ‘공동체 분쟁 해결’ 절차를 밟았다. 토트넘뿐만 아니라 다른 EPL 구단들은 손흥민에 연대해 인종차별성 발언을 방치하는 소셜미디어 업체에 항의하는 뜻으로 나흘간 해당 소셜미디어에 대해 보이콧을 실시하기도 했다. 비니시우스 주니오르를 향해 ‘원숭이’ 등 혐오 발언을 한 관중에 대해 스페인 법원은 징역 8개월을 선고했다. 스페인왕립축구연맹은 해당 구단에 대해 5경기 경기장 부분 폐쇄 징계와 벌금, 해당 관중에 대해 경기장 영구 출입 금지 조치를 내렸다.
한 야구계 관계자는 “외국 스포츠 구단들이 차별 행위에 엄정하게 대응하는 반면 국내 구단들은 팬들의 차별적 언행이나 사이버 폭력에 도리어 눈치를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2020년 미국에서 귀화한 흑인 농구 선수 라건아가 자신과 가족을 겨냥한 차별 욕설을 공개한 데 이어 2022년 KIA 외국인 투수였던 로니 윌리엄스(27)가 소셜미디어로 인종차별 발언을 듣는 등 일부 팬들의 차별적 행각이 계속해서 문제가 되고 있지만 구단이나 스포츠계 전반의 대응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KBO도 규약 제151조에서 선수나 구단, 코칭 스태프 등이 종교·인종·성차별 등으로 경기 외적으로 품위를 손상하는 행위를 하여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경우 실격 처분, 직무 정지, 참가 활동 정지, 출장 정지, 제재금 부과 또는 경고 처분 등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작년 6월 프로축구연맹은 소셜미디어에서 과거 전북 현대에서 뛰었던 태국 국가대표 수비수 사살락을 겨냥한 인종차별 발언(피부색 언급)을 게시한 박용우·이규성·이명재에게 출장 정지 1경기, 제재금 1500만원 징계를 내린 바 있다. 연맹은 “인종적 특성으로 사람을 구분하거나 농담 소재로 삼는 것 역시 인종차별 내지 인권 침해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배준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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