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트럼프는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https://www.facebook.com/DonaldTrump)에 레이건 대통령과 만나 악수하고 있는 자신의 사진을 올렸다. 레이건 시대에서 트럼프 시대로 이어지는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연속성이 보인다. /페이스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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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2.0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트럼프라는 개성적 인물이 세계 최강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가진 미국의 최고 권력을 또 거머쥐었기에 전 세계가 다시 묻고 있다. 트럼프는 누구인가? 과연 어떤 사람인가? 좌충우돌하는 돈키호테인가? 좌고우면하는 햄릿인가? 큰 권력이 그에게 집중되기에 자연스럽게 드는 질문이겠지만, 트럼프 일개인의 심리 분석만으로는 급변하는 미국의 세계 전략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트럼프 2.0 시대에 슬기롭게 대응하기 위해선 트럼프란 인물에 빠지지 말고 트럼프 정권을 창출한 미국 보수세력의 정강·정책과 가치지향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나 70여 년 한미동맹의 엄호 아래서 번영과 발전을 이룩해 온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선정적 가십과 도발성 억측은 접어두고 트럼프 2.0 시대 미국의 비전과 전략을 탐구해야 하지 않을까?
트럼프를 알려면 트럼프 1기 정권의 정책을 살펴야
50만 명 이상의 유튜브 구독자를 가진 한국의 한 보수 논객은 미 대선이 치러지던 11월 5일 당일 해리스의 승리를 예측한 외신 보도를 소개하면서 “트럼프가 당선되면 한국과 대만과 우크라이나가 안보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트럼프의 승리는 세계 독재자들의 승리가 될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트럼프가 전통적 동맹을 방기한 채로 단기적 국익만을 위해서 세계 평화를 등한시하며 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과 적당히 타협할 것이라는 비현실적 극단론이지만, 미국 주류 언론의 편향적인 반트럼프 보도에 장기 노출된 사람에겐 이런 말이 귀에 솔깃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 트럼프의 세계 전략을 알고 싶다면 그의 관상이나 언행을 살피기 보단 트럼프 1기 정권의 군사·외교 정책을 되짚어봐야 한다.
트럼프는 초지일관 ‘싸우지 않고서 이기는 전략’을 추구했고, 그 결과 마지막 16개월 동안 트럼프 1기 정권은 최소 네 가지의 중요한 외교적 성과를 냈다. 첫째, 2020년 9월에서 2021년 1월까지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은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모로코, 수단과 각각 국교를 정상화하는 아브라함 조약을 체결했다. 둘째, 미국의 중재로 세르비아와 코소보는 양국의 경제 관계를 정상화했다. 셋째, 미국의 압박으로 이집트와 주요 걸프 국가들은 카타르와의 분쟁을 종식하고 아랍에미리트에 대한 봉쇄령을 해제했다. 넷째, 탈레반과 적극적으로 협상하여 트럼프 정권은 마지막 1년간 미군 전사자 발생을 극소화했다. Robert O’brien, “The Return of Peace Through Strength,” Foreign Affairs, 2024. 6.18)
2020년 9월 15일 미국 백악관에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중재로 아브라함 조약이 체결되었다. 왼쪽부터 바레인의 외교무 장관 아브라티프 빈 라시드 알자야니(Abdullatif bin Rashid Al-Zayani), 이스라엘 수상 벤자민 네탄야후(Benjamin Netanyahu), 미대통령 트럼프, 아랍에미리트 외교부장관 압둘라 빈 자예드 알 나햔(Abdullah bin Zayed Al Nahyan). /위키피디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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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통한 평화”: 레이건의 군사·외교 노선을 계승한 트럼프
트럼프의 외교 노선은 지난 40여 년 미국 보수세력이 설파해 온 가장 중요한 군사·외교 적 원칙에 기반하고 있다. 그 원칙은 바로 “힘을 통한 평화(peace through strength)”이다. 로마제국 황제 하드리아누스(76-138)가 남겼다는 이 한마디 경구 속엔 동서고금에 적용되는 국가 방위의 기본 원칙이 담겨 있다. “힘을 통한 평화”란 “안 싸우고 적의 군대를 굴복시켜야 최선(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이라는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지략(智略)과 공명한다.
250년 미국 헌정사에서도 여러 대통령이 바로 그 원칙을 금과옥조로 삼았다.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도 “평화를 원하면 늘 전쟁을 준비하라” 외쳤고,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는 “말은 부드럽게 하되 큰 몽둥이를 갖고 다니라” 했다. 1980년대 들어와서 레이건(Ronald Reagan, 1911-2004)은 바로 그 “힘을 통한 평화”의 원칙에 따라서 1980년 GDP 5.2%에 달했던 방위비를 대폭 늘려 8년 내내 GDP 6~7%를 지출하며 군비를 증강했다. 그 결과 레이건 정권은 총 한 방 쏘지 않고서도 “악의 제국” 소련을 스스로 무너지게 하는 세계사적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레이건을 미국 헌정사 최고 대통령이라 칭송하는 트럼프는 2020년 9월 유엔 총회 연설에서 “미국은 ‘평화 중재자(pacemaker)’의 숙명을 실천하겠지만, 그것은 힘을 통한 평화”라고 선언했다. 트럼프 정권이 명시적으로 레이건 시대의 군사·외교 노선을 계승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규정하고선 미국인들을 향해 “우리가 이기고 저들이 진다(we win, they lose)”라는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확신을 표명했다. 바로 그러한 레이건의 정신을 이어받은 트럼프는 중국과의 정면 대결을 시대의 소명으로 내세우고 있다.
”힘을 통한 평화”의 원칙은 트럼프 1기 정권에서 군사력 강화 전략으로 표출됐다. 실제로 트럼프 정권은 방위비 예산을 대폭 늘려서 군대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트럼프 정권이 군산복합체를 되살리고, 세 차례에 걸쳐 병사들의 연봉을 올려주고, 미합중국 우주군을 창설하는 적극적인 군사력 강화의 조치를 취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 보수주의의 부활: 레이건에서 트럼프로
2016년 대선 때부터 트럼프는 외쳤던 “위대한 미국 재건(MAGA, Make America Great Again)”이란 구호는 사실 레이건의 모토였다. 트럼프는 소위 “레이건 혁명”의 국가 개조 전략을 되살려서 바로 오늘 위기와 혼란에 직면한 미국 사회를 재건하겠다고 부르짖었다.
2023년 60번째 대선을 1년 앞두고서 공화당의 재집권을 위해 미국의 보수세력은 워싱턴 DC의 헤리티지 재단을 통해서 “프로젝트 2025: 집권 명령, 보수주의의 약속(Mandate for Leadership: The Conservative Promise)”을 출판했다. 920페이지를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행정조직, 군사전략, 사회복지, 경제정책, 독립적 규제 기구 등 다섯 방면에 걸쳐 보수세력의 집권 전략과 통치 방법을 상세하게 논의한 이 정책집은 “레이건 혁명”에 대한 회고에서 시작된다.
198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대표로 출마한 레이건이 내건 구호는 “Let’s Make America Great Again.” 2016년 트럼프는 이 구호를 차용해서 MAGA 운동을 펼쳤다. /위키커먼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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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 사회에 몰아쳤던 반전(反戰)시위와 “리버럴 혁명(liberal revolution)”의 광풍은 전통적 삶을 살아가던 미국인들의 역사적 자긍심, 애국심, 기독교적 가치관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특히 1975년 4월 30일 미국 전역 모든 가정에 중계됐던 베트남 “사이공 함락”의 충격적 장면은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몰락과 공산주의의 흥기를 알리는 신호탄처럼 보였다.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국제 질서가 소련이 이끄는 공산주의 진영에 패배하여 붕괴할 지도 모른다는 이념적 공포가 미국 보수층에 널리 퍼져 있었다. 가족이 해체되고, 학교와 교회가 무너지고, 마을 공동체가 붕괴되면서 미국 사회 전역에선 범죄율이 치솟았다. 당시 카터 정부는 빈곤 퇴치와 사회 안전망 구축에 노력했으나 정부 부문만 커졌을 뿐 저소득층은 정부에 의존한 채로 더욱 극심한 빈곤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오늘날 미국 보수세력이 보기에 오늘날 미국 사회의 위기는 1970년대 말 미국의 상황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그들의 눈에는 최근 10여 년 미국 사회를 휩쓸고 있는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 운동과 워키즘(wokism) 따위도 1960년대 널리 퍼졌던 히피들의 반사회 운동이나 1970년대 유행했던 “래디컬 쉬크(radical chic)”의 재판에 불과하다. (여기서 “래티컬 쉬크”란 부유한 엘리트층이 자기 나름의 신념이나 논리도 없이 그저 패션 상품 구매하듯 과격한 좌파의 주장에 동조하는 경향을 이른다. 한국어로 뜻을 옮기면 강남좌파의 허위의식 정도가 아닐까.)
1970년대 말 그랬듯 오늘날 미국의 중산층 가정은 인플레이션으로 경제적 곤경에 처해 있고, 하층민은 빈곤의 함정에서 탈출하지 못하며, 마약성 진통제 펜타닐 남용으로 사망자가 날로 늘고 있고, 성전환 풍조와 포르노물이 만연하면서 청소년은 심각한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 무서운 속도로 일어서는 중국이 값싼 공산품으로 미국의 산업기반을 위협하면서 교묘하고도 저돌적인 방식으로 미국을 내부에서 허무는 정치전(政治戰, political warfare)을 전개하는 현실도 역시 과거 소련이 미국에 가했던 이념적·군사적·정치적 위협을 방불케 한다. (Mandate for Leadership: The Conservative Promise)
트럼프의 승리 비결: 마음을 읽고 진실을 말하라
1980년 미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발탁된 70세의 레이건은 반문화의 역습에 지쳐 근원적 변화를 원하는 보수적 유권자를 향해서 2차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끌고서 공산주의를 봉쇄하며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유지해 온 미국의 세계사적 공헌을 적극적으로 설파했다. 8년에 걸친 “레이건 혁명”의 시대가 막을 내리자 곧바로 동유럽의 공산정권들이 줄도산했고, 1991년 12월 말에는 소련이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영원히 계속될 듯했던 미·소 냉전에서 미국이 완벽하게 승리하는 순간이었다. 레이건 혁명을 거치면서 미국 보수세력은 다시금 국가적 자부심과 역사적 자긍심은 물론, 전통적 가치관과 기독교적 세계관을 되찾을 수 있었다. 대망의 1990년대 그들은 비로소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승리와 “역사의 종언”을 이야기했다.
1983년 방한하여 DMZ를 찾은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facebook.com/korean.dmz.vets) /페이스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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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들어오면서 미국인들은 1990년대 그들을 들뜨게 했던 메시아적 희망을 거의 망실해버렸다. 1980년대의 영광을 기억하는 미국의 보수세력은 2024년 대선에 앞서 재집권을 위한 사회 운동을 부지런히 전개했다. 그들은 다시금 1980년의 레이건처럼 보수적 가치를 되살릴 수 있는 영웅의 등장을 꿈꿨다. 그들이 펴낸 정책집에는 미국 재건의 비전이 선명한 언어로 제시돼 있다. 그들의 비전이란 무너진 가족을 되살리고, 건전한 상식을 회복하고, 시민적 자치(自治, self-government)를 재건하고, 전통적 가치를 복원하고, 개인적 자유를 신장한다는 강령으로 정립되었다. 트럼프는 그러한 미국 보수세력의 가치지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탁월한 쇼맨십을 발휘하여 2024년 대선에서 “1980년대 레이건”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미국은 이미 70~80년간 전 세계 140여 개 국가에 군사기지를 두고서 명실공히 세계의 경찰로서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유지하고 관리해 온 나라다. 비록 입 밖으로 공공연히 말하진 않아도 미국인 다수는 2차대전 이후 세계 평화 유지의 인류사적 사명을 수행한 그들 나라에 대한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작은 마을에서 교회에 다니며 성경 말씀을 듣고 자란 미국인들은 한평생 매일 밤 기도하고 입버릇처럼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은 종교적 신념도 내놓고 말하기 힘든 세상을 맞게 되었다. 부모가 자식에게 전통적 이성관과 성(性) 윤리조차 말할 수도, 전하기도 무서운 분위기는 어떤가? 이번 대선을 계기로 미국에서는 성전환의 자유와 워키즘을 설파하는 좌파 집단만큼이나 소도시의 보수세력이 정치화되었다.
트럼프는 그들의 지지 위에서 대권을 재탈환했다. 그는 문화적 불안감에 내몰린 미국인들의 억눌린 자부심과 상처받은 종교심과 불안한 가족관을 공개적으로 옹호하며 상식과 자유를 지키겠다고 공언했고, 반대편을 향해선 직설의 말화살을 거침없이 쏘아댔다. 그 결과 문화적 마르크시즘에 밀려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야만 했던 전통적 가치관을 가진 평범한 미국 시민들은 그를 향해 열광적 지지와 성원을 보냈다. 트럼프가 그들의 마음을 정확히 읽고 느끼는 바 진실을 솔직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을 위해 유세하는 트럼프. /Politico.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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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에서 트럼프로 이어지는 미국 보수주의의 계보를 놓고 보면,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이 전 세계 경찰이자 평화 중재자로서의 미국의 국제적 지위와 역할을 축소하거나 포기하는 전략이 아님은 확실해 보인다. 트럼프의 군사외교 전략은 전통적 동맹국과의 유대를 더욱 강화하여 중국·러시아·북한·이란을 더 효율적으로 봉쇄하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트럼프 1기 정부 고위 관료들이 만트라처럼 읊조렸다는 “미국 먼저는 미국 홀로가 아니다(America First is not American Alone)”이라는 한마디가 그 점을 웅변한다.
군사적 측면에서 트럼피즘(Trumpism)은 외교적 고립주의(isolationism)로의 회귀가 아니라 오히려 1980년대 레이건 정권이 추구했던 군사적 자강(自强) 노선의 재천명이라 할 수 있다. 레이건이 자유의 깃발을 들고서 악의 제국 소련을 붕괴시켰듯이 트럼프는 자유의 바통을 이어받아서 자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유린하는 전체주의 중국과의 대결을 예고해 왔다. 레이건에서 트럼프로 이어지는 미국 보수주의의 흐름을 보지 않고선 트럼프 2.0 시대를 예측할 수 없다.
레이건 시대로의 회귀는 비단 트럼프 일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트럼프 2.0 시대를 창출한 미국 보수세력의 일반 여론이다. 트럼프 권력을 재창출한 미국 사회는 시방 1980년대 난파 직전의 미국을 근본적으로 치료하여 세계 최강의 국가로 다시 일으켜 세운 레이건과 같은 영웅을 희구하고 있다. 과연 트럼프가 레이건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느 나라 지도자든 효과적인 대미 정책을 세우기 위해선 트럼프를 다시 불러낸 평범한 미국 시민들의 마음을 읽으려 노력해야 할 듯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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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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