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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9 (월)

‘힘세고 거대한 여자’의 불온함을 깨뜨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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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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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뉴멕시코. 체육관 관리인인 루(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변기를 막은 오물처럼 비루하고 질척거리는 일상을 살고 있다. 그런 루 앞에 갈색 피부와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는 재키(케이티 오브라이언)가 등장한다. 그는 보디빌딩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는 중이다. 첫눈에 반한 두 사람은 곧 달콤한 사랑에 빠진다. 재키는 루에게 이 지루한 동네를 함께 떠나자고 조르지만 루는 그럴 수 없다. 복잡한 가정사가 발목을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 루 시니어(에드 해리스)는 동네를 좌지우지하는 범죄 조직의 수장이다. 한때는 아버지의 가장 사랑받는 딸이자 수족이었던 루는 이제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쉽지 않다. 루 시니어에게 배신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나밖에 없는 언니 베스 역시 골칫거리다. 베스는 심각한 가정폭력에 시달리면서도 남편 제이제이를 떠나지 못한다. 루는 언니가 형부에게 맞아 죽기 전에 자신이 그를 죽여버릴 거라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야말로 죽기 직전까지 얻어터진 베스를 본 재키는 루 대신 행동에 나선다.







여성의 근육과 자연 질서 교란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2020년대의 감성 안에서 색다른 레즈비언 누아르를 선보인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루가 자기만의 여신 재키에게 바치는 스테로이드 주사다. ‘자연적’으로 근육을 키워왔던 재키는 루의 선물에 빠져들고, 두 사람은 약물이 선사하는 흥분 속에서 서로의 몸을 탐닉한다. 스테로이드는 재키와 루 모두에게 주어진 한계를 넘어 다른 세계로 진입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탈출구다. 재키에게 보디빌딩 대회 우승은 꿈의 땅 캘리포니아에서 트레이너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게 해줄 열쇠이고, 루에겐 재키 그 자체가 새로운 세계이므로.



동시에 이 약물은 재키의 정신과 신체를 오염시켜 다른 존재로 전환시키는 이물질이다. 건강하게 신체를 단련시키면서 꿈을 향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던 재키는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으면서 점차 변해간다. 그가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제이제이를 살해하게 되는 것도 결국은 스테로이드 때문이다. 아내를 괴롭히고 때리면서 하찮은 위력을 과시하던 제이제이는 괴력을 발휘하는 재키 앞에서 마른 낙엽처럼 바스러진 채 처참한 꼴로 죽음을 맞이한다. 재키가 스테로이드가 낳고 키운 폭력성에 휘둘리게 되면서 사건은 점점 더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내달린다.



영화는 스테로이드를 찬양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하게 더럽고 위험한 약물로 폐기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여성 신체와 스테로이드가 맺어온 관계를 기존의 담론과는 다른 방식으로 탐색한다. 영화가 1989년을 배경으로 하면서 여성 보디빌더를 다룬 모큐멘터리(페이크 다큐멘터리) ‘펌핑 아이언 2’(1985)를 참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80년대는 미국에서 여성 보디빌딩이 엄청나게 붐을 이루었던 시기였다. 가장 이름 높은 여성 보디빌딩 대회 중 하나인 ‘미스 올림피아’는 1980년에 처음 열린다. 이후로 미국에서는 ‘세계 프로 여성 보디빌딩 선수권대회’에서부터 지역 피트니스센터가 후원하는 아마추어 대회에 이르기까지 매년 12개의 대회가 개최됐다. 그 정점을 찍은 해가 1989년이었다. 이런 대회들에 참가했던 여성들의 수도 1980년 40명에서 시작해 해가 더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1989년이 되면 1만6천명에 육박했다.



포스트-페미니즘의 시기이자 백래시의 시기이기도 했던 1980년대. 미국 사회는 페미니즘 제2물결 이후 등장한 근육질의 여자들을 적극적으로 상품화하면서 동시에 안전하게 봉합하고자 했다. 신체적으로 강한 여자는 이미 전통적인 성별 관념 안에서 그 자체로 위반적인 존재였지만, 근육을 키운 여자는 더욱 위협적이었다. 여자가 ‘모성이라는 본능에 충실한 신체’를 거슬러 인위적인 기술과 약물을 활용해 몸을 만든다는 것, 그리하여 통념적으로 남성성(masculinity)으로 여겨졌던 자질을 획득하려 한다는 것은 자연 질서에 대한 교란으로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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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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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지의 ‘스몰 걸’ 겹쳐 보이는





이 시기 미국 대중문화는 여성 보디빌더와 스포츠맨의 이러한 위반적인 속성을 강조하면서 볼거리로 만드는 동시에 어떻게든 이들의 외모를 “성적 매력에 대한 정형화된 이미지” 안에서 묘사하고 이성애적으로 성애화함으로써 익히 알고 있는 안전한 여성성 안으로 포획하고자 했다.(앤 마리 발사모, ‘젠더화된 몸의 기술’) 이런 담론 안에서 스테로이드는 여자를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괴물로 만드는 테크놀로지, 즉 여자를 ‘남자로 바꿔놓는’ 약물로 여겨졌다. 영화는 레즈비언 섹슈얼리티, 스테로이드가 흐르는 여성 신체, 그리고 폭력과 살인을 한자리에 섞어놓으면서 이 모든 관습적인 여성 재현에 침을 뱉는다.(아니 피를 튀긴다.)



신체적 강인함을 남성의 몫으로 고집하는 문화에서 여자에게는 작은 몸이 강요된다. 이것이 크게 웃고 크게 말하며 시끄러운 성격을 가진 이영지가 노래하는 “작은 여자 판타지(small girl fantasy)”가 등장하게 된 사회적, 문화적 맥락이다. 그러므로 ‘러브 라이즈 블리딩’과 ‘스몰 걸’ 뮤직비디오가 구름을 뚫고 우뚝 솟아 세상을 내려다보는 ‘거대한 여자’라는 유사한 이미지를 공유하는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지금·여기에서 필요한 해방의 이미지였던 것이다.



물론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괜찮은 러브 스토리다. 루의 체육관에 붙어 있는 격언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고통은 그저 나약함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이는 신체 단련의 고통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건 사랑의 고통에 대한 언급이기도 하다.(재키는 동생에게 “너는 사랑에 빠지지 마, 너무 고통스러워”라고 말한다.)



타인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일은 유독한 스테로이드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처럼 거부할 수 없는 쾌락과 고통으로 나를 변화시키는 일이다. 때로 그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 혹은 원했던 적 없는 방식으로 나를 강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랑이란 운동만큼이나 열정적으로 부지런해야 가능한 일이구나 싶다. 그래서 나이 들고 지친 나는, 청년들의 사랑보다 여성 보디빌딩의 역사에 더 관심이 가는 거구나, 싶기도 하고.



영화평론가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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