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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9 (월)

[만물상] 사라지는 DJ 동교동 사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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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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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속주인 달마티아의 작은 마을에서 해방 노예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이 들어 은퇴한 그는 고향에 7m 높이 성벽으로 둘러싼 요새 같은 사저(私邸)를 지었다. 후임 황제가 “로마로 돌아와 도와달라”고 했지만 “양배추를 심고 돌봐야 한다”며 거절했다. 그가 죽고 300년 후 야만족 침공 때 주민들이 사저로 피신해 목숨을 구했다. 이후 주변에 건물이 잇따라 들어섰고 크로아티아 제2의 도시 스플리트가 됐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쓴 제퍼슨 대통령은 버지니아 시골 마을에 손수 집을 지어 58년간 살았다. 회랑과 연못 등 로마 건축 양식을 딴 아름다운 사저엔 당시로선 혁신적이었던 자동 여닫이문과 날짜·요일 시계 등 최신 장치가 가득했다. ‘몬티첼로’라 불리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먼로 대통령은 퇴임 후 생활이 곤궁해 사저를 팔았지만 독지가가 구입해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미 대통령 사저 대부분이 대통령이 쓰던 물건과 책 등을 복원해 전시하는 기념관이 돼 있다.

▶한국 대통령의 사저는 현대사의 굴곡에 시달리며 끊임없는 정치적 논란을 낳았다. 서울 종로 이화장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야 후 한 달밖에 살지 못하고 하와이로 망명하면서 빈집이 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당동 사저도 10·26 이후 사실상 방치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연희동 사저는 추징금 미납으로 압류당했고 가재도구까지 경매에 넘어갔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상도동 사저를 기부했지만, ‘김영삼 도서관’ 건립 과정의 부채 때문에 압류 위기까지 갔다.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논현동·삼성동 사저도 공매에 넘어가 기업인이 인수했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동교동 사저는 김영삼의 상도동 사저와 함께 민주화의 상징이었다. 부인 이희호 여사는 “사저는 기념관으로, 노벨평화상 상금은 기념 사업에 쓰라”고 유언했다. 하지만 3남 김홍걸 전 의원은 사저를 개인 소유화했다. 형인 김홍업 전 의원과 소유권 분쟁이 벌어지자 뒤늦게 유언을 따르겠다고 했다.

▶그는 이달 초 동교동 사저를 100억원에 매각했다. “거액의 상속세 때문으로 어디까지나 사적인 일”이라고 했다. 매입자가 사저 일부에 DJ 유품을 전시하기로 했다고 했다. 유언을 어기고 유품 관리까지 남에게 맡긴 것이다. 그는 과거 거액의 코인 거래가 드러나자 “상속세를 충당하려고 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사저 접견실 등 집안 곳곳엔 DJ와 한국 정치사의 흔적과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런 소중한 역사까지 모두 없어질 판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배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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