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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9 (월)

유럽이 죽도록 가난해졌다고?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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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탈리아 로마의 한 슈퍼마켓에서 고객들이 쇼핑을 하고 있다. 로마/신화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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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욱 |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



우리 연구원엔 세계 각 지역을 담당하는 8개 연구팀이 있다. 여러해 동안 한 지역을 맡아 연구하다 보면 자연스레 애정이 생긴다. 선배들이 우스갯소리로 미국팀은 친미파, 중국팀은 친중파, 일본팀은 친일파가 된다고 얘기했을 땐 웃어넘겼는데, 막상 몇년 있어 보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맡은 지역이 다른 데보다 더 잘해주면 좋겠고, 안 좋은 평가를 받으면 속이 상하고 반박하고 싶고 그렇다.



내가 맡은 유럽은 요새 분위기가 영 안 좋다. 팬데믹 때 받은 경제 충격 자체가 워낙 컸고 이후 인플레이션과 전쟁발 에너지 위기를 겪으며 회복도 매우 더디다. 더 우려스러운 건 장기 추세다. 2010년엔 미국과 유럽연합(영국 제외)의 경제 규모가 비슷했지만, 지난해엔 미국이 유럽보다 1.5배 더 커졌다. 미국이 빅테크 기업을 앞세워 고공성장을 계속하는 사이 유럽은 기술혁신에서 뒤처진 까닭이다. 요 몇달 언론에서 유럽을 수식하는 단어는 “추락하는”, “처참히 몰락하는”, “끔찍한” 등이다. 십수만명이 본 한 유튜브 영상에는 심지어 이런 제목이 달려 있었다. “유럽이 죽도록 가난해졌다.”



내가 유럽팀이어서 그런 게 아니라 이런 혹평은 대부분 과장이다. 물가와 환율을 조정한 ‘구매력평가’ 기준으로 보면 지난해 유럽의 국내총생산(GDP)은 미국보다 7% 적었을 뿐이다. 2010년에 비해 격차가 늘긴 했지만 “죽도록 가난해진” 수준은 아니다. 1인당 지디피나 노동생산성을 비교하면 지난 15년간 격차가 오히려 줄었다. 요새 죽을 쑤고 있다는 독일의 근로시간당 생산량은 꾸준히 증가하여 2022년에 미국을 넘어섰다. 기본적으로 유럽의 평균 근로시간이 미국보다 적은데, 독일 사람들은 특히나 일을 덜 하기 때문이다. 미국 근로자가 주평균 32.3시간 일하는 데 비해 유럽연합 평균은 30.8시간, 독일은 25.7시간이다. 말하자면 적게 일하고 적게 벌길 선택한 것이다.



소득 말고 다른 지표도 보자. 2022년 기준 미국의 상위 10%가 버는 평균 세전소득은 하위 50%보다 16.3배 많았다. 같은 수치가 독일은 9.5배, 프랑스는 7.8배, 스웨덴은 6.6배였다. 죽는 사람을 보면, 10만명당 산업재해 사망률은 독일 0.7명, 스웨덴 0.8명, 프랑스 2.6명, 미국 3.7명이며, 10만명당 자살률은 독일 9.7명, 스웨덴 11.6명, 프랑스 12.5명, 미국 14.1명이다. 친환경 전환 속도도 보자. 지난해 재생에너지 전력 소비 비율은 스웨덴 53.9%, 독일 24.4%, 프랑스 16.9%인데 미국은 11.7%에 그쳤다. 유럽 국가들이 미국보다 돈은 덜 벌어도 더 평등하고 더 안전하고 환경을 더 사랑하는 거로 보인다.



그런데 유럽이 이룩한 이 사회적 성취가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는 게 아이러니다. 노동, 환경, 신기술 관련 규제는 기술혁신을 방해하고 인재 유출을 가속한다. 유럽이 자랑하던 각종 사회보장제도가 저성장, 인구 고령화와 결부되며 재정지출 여력을 낮춘다. 전쟁 상황에 무리한 친환경 전환은 에너지 비용을 증가시켜 산업에 부담을 준다. 핵심 산업에서 경쟁력을 잃고 뒤처지면 유럽이 그간 누리던 사회적, 문화적 우위도 사라질 수 있다. 과장된 측면이 있다 해도, 유럽을 향한 우려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유럽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노동과 환경에 대한 높은 기준을 포기하고 형평성을 다소간 희생하면서까지 고성장을 추구할 것인가. 혁신을 위해 잠재적 위험을 감수하고 기술 규제를 철폐할 것인가. 산업에 주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에너지 전환을 조금 늦출 것인가. 지금 떠들썩한 ‘유럽 위기론’은, 유럽이 혁신과 성장을 위해 사람에 대한 보호를 포기해야 한다고 등 떠밀고 있다.



이제 유럽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지난달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가 약진하며 현재 방식에 대한 불만이 표출되긴 했지만 ‘유럽의 가치’에 대한 믿음이 여전하다는 근거도 있다. 중도 집권 세력은 이번에도 과반을 유지했고, 이를 바탕으로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이 연임에 성공했다. 집행위원장은 다음 임기 과제로 규제 완화와 산업 경쟁력 강화를 내세우면서도, 형평성 증진과 낙오된 그룹에 대한 지원을 높은 순위 정책 의제로 포함했다. 유럽이 성장과 보호 두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을까? 유럽팀원으로서, 유럽이 좋은 모델이 되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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