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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6 (월)

‘존엄사’ 찾아 떠난 한국인들 [이석태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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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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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태 | 전 헌법재판관



2022년 6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연명의료결정법)의 개정안으로 발의되었다가 기간 경과로 폐기된 ‘조력존엄사에 관한 법률안’(조력존엄사법안)이 7월5일 다시 독립 법안으로 발의되자 그동안 잠잠하던 존엄사 논쟁이 다시 불붙는 듯하다. 안락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불치의 말기 환자가 의사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존엄사는 이미 서구 일부 국가에서 합법적으로 시행 중이다. 네덜란드는 2002년 세계 최초로 의사가 환자에게 약물을 투여하는 방식의 존엄사를 합법화했다. 스위스,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페인 등에서도 네덜란드와 비슷한 수준의 존엄사를 허용하고 있다. 특히 스위스는 외국인의 존엄사를 허용한다. 미국의 경우에는 10여개 주에서 의사의 도움을 받는 존엄사를 허용하고 있다.



존엄사(death with dignity)는 환자 자신의 의사를 바탕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며 죽는다는 뜻에서 그렇게 불리는데, 생명을 단축하는 과정에서 널리 환자의 고통을 줄여준다는 의미로 쓰이는 안락사(euthanasia)와 대비된다. 연명의료결정법 3조 1항은 ‘호스피스와 연명의료 및 연명의료 중단 결정에 관한 모든 행위는 환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하여서는 아니 된다’라고 하여 인간의 존엄성 존중을 명문화하고 있다. 2023년 3월 스위스의 한 조력 사망 단체의 가입자 통계에 의하면, 한국인 4명이 의사의 조력을 받아 사망하였고 117명이 대기 중이다. 이는 일본(48명), 대만(49명), 중국(58명)의 2배 수준으로,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많은 것으로 집계됐으며 전체 97개국 중에서도 11번째라고 한다.



이런 존엄사의 형태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말기 환자가 의사에게 요청해 의사가 직접 환자에게 약물을 투여하는 등으로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환자의 요청으로 의사의 처방을 받아 환자 자신이 약물을 복용하여 사망하는 경우이다. 이번 발의안은 사망을 앞둔 환자가 참기 어려운 고통을 호소하면서 스스로 의사를 표명하는 전자의 경우에만 의사가 사망에 이를 약물을 처방하도록 명시하였다. 이 법안은 기존의 연명의료결정법에서 나아가 연명치료 중단 여부와 관계없이 환자의 의사만으로 의사의 조력을 받아 환자의 죽음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제도가 시행되면 지금까지 있어온 연명치료 중단 요청서 대신 환자 자신의 의사가 중요하므로, 그것이 불분명하거나 그런 의사 능력이 의심되는 경우 등 죽음을 원하는 환자의 의사가 진정한지 여부가 초점이 될 가능성이 있다.



여론조사기관인 한국리서치가 2022년 7월 조력존엄사 도입이 논의될 때 국내 성인남녀 1천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시행한 바 있다. 당시 조력존엄사 입법에 찬성한다는 의견은 82%에 달했다. 이는 서울대병원 가정의학 교수팀이 2021년 3월부터 4월까지 19살 이상 대한민국 국민 1천명을 대상으로 한 안락사·의사조력자살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와 거의 비슷했다(찬성 76.3%).



이에 대하여 의료계와 종교계 등은 반대하는 입장이다. 의사협회는 “사회적 논의와 합의가 부족한 상황에서 혼란만 초래할 수 있고, 합법적인 자살을 허용하는 결정을 내릴 위험도 높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종교계는 조력존엄사법안은 결국 자살을 돕는 입법으로서 생명 가치의 존중에 반하여 환자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입장을 내세운다. 생명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았으므로, 신의 의사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생명을 처분할 수 없다는 취지이다.



미국의 법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은 저서 ‘생명의 지배영역’에서 사람은 자신과 관계된 사항에 관하여 ‘향유적 이익’과 ‘비판적 이익’을 가지고 있는데, 존엄사는 비판적 이익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영화 구경, 골프 등 개인적인 호불호가 향유적인 이익의 예라고 한다면,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생 등 삶을 의미의 관점에서 전인격적으로 보는 것이 비판적 이익의 예가 된다. 따라서 불치의 질환과 마주한 환자가 생을 단순히 유지하는 향유적 이익을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가 지켜온 삶의 가치, 즉 비판적 이익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이 관점은 고통스러운 연명 대신 삶의 질을 중시하는 입장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드워킨은 주장한다. 그는 또 생명의 내재적 가치를 고려하는데, 이 입장에서는 신이 아닌 생명의 내재적 가치로부터 존엄사의 근거를 이끌어낸다.



헌법재판소는 2009년 11월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사건인 2008헌마385 결정에서 “연명치료는 의학적인 의미에서 치료의 목적을 상실한 신체 침해 행위가 계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고 … 비록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결정 및 그 실행이 환자의 생명 단축을 초래한다 하더라도 이를 생명에 대한 임의적 처분으로서 자살이라고 평가할 수 없고, 오히려 … 자신의 생명을 자연적인 상태에 맡기고자 하는 것으로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부합한다”고 판시한 바 있다. 지난 1월 헌법재판소는 존엄사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뤄보기로 했다. 존엄사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적지 않음에도 국회가 존엄사 관련 법안을 마련하지 않아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한 입법 의무를 위반했는지를 보기 위한 것이다. 청구인 쪽은 현행법에는 존엄사를 허용하는 근거가 없어 존엄사를 돕거나 방치할 경우 살인이나 자살방조 혐의로 처벌받을 가능성이 커 행복추구권과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한다.



2018년 5월 오스트레일리아 최고령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사망 당시 104살)은 사망 전날 기자회견을 한 뒤, 다음날 스위스로 건너가 스위스 법에 따라 의사의 도움을 받아 존엄사의 방법으로 삶을 마감했다. 가톨릭 신자인 드리스 판아흐트 전 네덜란드 총리 부부는 지난 2월 네덜란드의 법에 따라 함께 존엄사로 세상을 떴다. 이들이 의식이 명료한 상태에서 자신들의 의사로 연명치료보다는 그동안 쌓아온 명예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하여 존엄사를 택한 것은 명백하다. 이제 우리 사회도 죽음이 가까운 환자의 고통을 줄이는 소극적 관점에서 나아가 삶의 질과 가치, 의미를 생각하는 적극적 관점에서 진지하게 존엄사를 논의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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