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8.15 (목)

편의점서 파는 죽음… ‘안락사 키트’ 사려 그 청년은 나이 속였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아무튼, 주말]

[김동식의 기이한 이야기]

‘안락사 간편화’ 시대 오면

마주할지 모르는 편의점 풍경

2054년의 어느 주택가 편의점, 문이 열렸다. 카운터에서 안경을 닦던 알바생이 이윽고 문 쪽을 돌아보았다. 허리 굽은 백발의 노인이 부들부들 힘겹게 문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겨우겨우 편의점 안으로 들어와 긴 한숨을 내쉬더니, 눈앞의 상품을 식별하기 위해 매대에 얼굴을 거의 붙이다시피 했다. 하나하나 상품을 찬찬히 살피는 그 모습을 알바생이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노인은 아주 느린 속도로 편의점을 돌며 몇 가지 물품을 집어 들었다. 이윽고 노인이 계산대 위에 물건을 내려놓자, 알바생은 말없이 노인을 가만 노려보았고, 노인은 시선을 피했다.

“신분증 좀 보여주시죠.” “응?” “신분증요.” 노인은 마치 안 들린다는 듯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알바생은 알아들을 때까지 반복하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제야 노인은 알겠다는 듯 반응했다. “아…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예끼! 내 나이가 몇인데 신분증 검사를 해?” “신분증요.” 아니 이 사람아, 내가 백 살이 코앞인데 무슨 신분증 검사를 하냐니까.” “하 참. 이거요 이거.”

알바생은 매대 위에 어질러진 물건들 속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상자를 집어 들었다. “이거 80세 이상부터 구매 가능하신 거 아시죠? 안락사 키트.” 안락사 키트. 손목에 팔찌처럼 두른 채 버튼 한 번만 누르면 편안하게 삶을 마감할 수 있고, 신호를 받은 관계기관에서 뒷정리까지 알아서 해준다는 상품. 노인은 떨리는 눈동자로 그것을 외면하다가, 곧 다시 버럭 소리 질렀다.

“그러니까! 이 사람아, 딱 봐도 내 나이가 팔십이 넘는데 무슨 신분증 검사를 하느냐고!” “딱 봐도 그렇게 안 보이는데요?” “안 보이긴!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거야 뭐야!” 알바생은 지겹다는 듯 안락사 키트 상자로 카운터 테이블 위를 두드렸다. “이보세요. 손님처럼 안락사 키트 뚫으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 아세요? 하루에도 몇 번씩 나이 속이는 양반들이 온다고요.” “나, 나는 아니라니까? 난 진짜 내일모레 백 살인….” “딱 봐도 칠십 언저리구만. 거 할아버지, 허리 펴봐요. 솔직히 펴지잖아요?”

조선일보

일러스트=한상엽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노인은 뜨끔한 모양새였지만 굽힌 허리를 펴진 않았다. 알바생은 혀를 찼다. “가만 보니 머리카락도 하얗게 탈색한 거네. 염색한 티가 나요 할아버지.” “무, 무슨 소리야? 원래 내 머린데.” 노인은 알바생의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그쪽 같은 사람들 때문에 편의점이 얼마나 피해가 큰 줄 알아요? 그쪽이야 그냥 한번 거짓말로 뚫는 거지만, 이거 한 번 잘못 판 편의점은 몇 달 영업정지라고요. 막말로 이 나라 법은 참 이상하단 말야. 속인 놈을 벌 줘야지 왜 속은 놈을 벌 줘? 참 나.”

혼자 혀를 찬 알바생은 상황을 정리했다. “신분증 없으시죠? 나머지 물건도 안 사실 거죠? 그럼 얼른 나가세요.” 아무 말 못 하고 우물쭈물하던 노인은 순간, 대놓고 곡소리를 냈다. “아이고! 늙으면 죽어야지 아이고! 살아서 이런 수모를 다 겪네! 아이고!” 알바생의 헛웃음을 유발한 노인의 가짜 곡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아이고! 물건 하나도 내 마음대로 못 사고! 아이고! 나이가 백 살이면 이런 대접을 받는구나!” 알바생은 단호했다. 무덤덤하게 손만 앞으로 내밀었다. “신분증만 가져오세요.”

곡소리를 줄인 노인은 기어이 굽었던 허리를 펴고 섰다. “그래, 나 일흔둘이다! 곧 있으면 여든인데, 그냥 팔아줘!” “안 된다니까요 글쎄.” “왜 안 돼! 내가 죽고 싶다는데 왜 안 되냐고! 편하게 죽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못 해?” “법적으로 못 합니다. 국가에서 안 된대요.” “이런 망할! 내가 죽고 싶다는데 왜 안 돼! 막말로 편의점에서 이딴 걸 팔 정도면, 국가에서도 늙은이들 죽으라고 등 떠민 거잖아! 안 그래? 근데 왜 안 되냐고!” 노인이 악을 써대자, 알바생도 기어이 폭발했다.

“이 양반아! 당신은 죽기엔 너무 어리다고! 일흔둘이면 한창 일해야 될 나이에 말이야! 나라에 젊은 애들이 없는데! 우리가 적어도 팔십까진 열심히 일해야 할 것 아니야! 일흔다섯인 나도 이렇게 열심히 알바하는데 말이야!” 불같이 화를 내는 알바생의 모습에 노인은 찔끔했다. “아, 79년생이십니까…?” “그래! 82년생이 벌써부터 안락사 키트를 찾고 말이야 어디. 한창 일해야 될 나이에 확.” 노인은 멋쩍게 입술만 핥다가, 조용히 계산대 위의 물건들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냥 둬. 내가 정리할 테니까.” “아 네….”

노인은 꾸벅 인사한 뒤 편의점 밖으로 나섰다. 들어올 때와는 달리 빠른 발걸음으로. 노인은 편의점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그가 나타나자마자 20대 청년이 빠르게 다가왔다. “성공하셨습니까?” “아니 그게…. 미안하네.” 노인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청년에게 돌려줬다. “못 뚫었어. 돈은 돌려줄게.” 청년은 실망한 얼굴로 심부름 값을 되돌려 받았다. 노인은 떠나기 전 말했다. “그,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긴 한데, 웬만하면 살지 그래. 그렇게 젊은 나이에 왜….” 노인이 골목을 떠나자, 청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나라에 몇 안 되는 청년이라면 누구나 흔히 내뱉는 그것을 말이다.

※픽션입니다.

[김동식 소설가]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