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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6 (일)

가위에 눌리다 [말글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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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8일 광주시 북구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열린 제44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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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은 어원 밝히기가 어렵다. 문자 만든 지 600년, 본격적으로 쓴 지 100년 남짓이니 그럴 수밖에. ‘가위에 눌리다’에 쓰인 ‘가위’의 어원이 궁금하겠지만, 근거 있는 얘기를 들려줄 수 없다. ‘능엄경언해’, ‘구급방언해’ 같은 옛 자료에 ‘가위눌리다, 가위 누르다’ 같은 예가 나온다고 말할 뿐(가위 누르는 귀신을 염귀라 한다면서).



가위눌림이 귀신 때문일지 수면장애 때문일지보다는 그것이 남기는 심리적 상처에 관심이 간다. 내 20대는 사흘이 멀다 하고 가위눌림에 시달렸다. 나는 86세대에게 아직도 사회적 부채 의식 비슷한 게 남아 있다면, 그 의식을 지탱하는 힘은 ‘두려움’이라고 생각한다. 군사정권에 돌을 던질 용기도 밤의 두려움과 함께여야 온전하다. 낮엔 두려움을 의지로 버티지만, 잠들면 무너지기 일쑤. 분열되고 불안하다.



백골단이 쫓아오고 걸음은 제자리, 밟히거나 맞거나 낭떠러지에서 떨어진다. 미동도 않는 몸에 덜컥 겁이 나 손가락을 까닥거리고, 으-으 소리를 내어 숨을 이어 붙이다가, 푸헉 하며 죽음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기 일쑤.



프로이트는 꿈이 현실의 어떤 징후를 나타낸다고 한다. 맞다. 존재하지만 은폐된 무엇이 꿈에 드러난다고 한다. 맞다. 강도를 만나 두려움에 떤다면, 강도는 상상의 것이지만 두려움은 현실적인 것이다. 맞는 말이다. 86세대의 비극은 쫓아오는 것이 강도도 귀신도 아닌, 전투경찰이고 군인이었던 것.



그 가위눌림의 근원은 80년 광주다. ‘그들’처럼 총칼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 두려움을 안고도 도청을 지킨 용기에 대한 부채 의식. 정치적 자유와 인권은 부족함이 없으니 고속 성장으로 계승하자는 대통령의 5·18 기념사를 들으며, 가위눌림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 확신에 찬 무례함에 치가 떨린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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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해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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