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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그 아이를 비난하기 전에 [뉴스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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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성인 페스티벌’(2024 KXF The Fashion) 주최 쪽이 지난달 18일 행사 취소를 알리고 있다. 유튜브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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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미 | 프로덕트서비스부장



“심장이 부들부들 떨린다.” “와, 미쳤나 봐. 진짜 무섭다.” “섬뜩해서 소름 돋았어.”



지난달 23일 친구와 지인이 모인 온라인 단체대화방이 동시에 난리가 났습니다.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초등학교 고학년 남학생들이 “성관계 놀이를 하자”, “돈 주겠다”며 저학년 여학생들을 따라다녔다는 뉴스가 보도된 뒤였습니다. 여학생을 놀이터로 데려가 신체 일부를 보여준 남학생도 있었다고 합니다. ‘일 그만두고 아이를 지켜야 하나’ 하는 생각이 잠깐 스쳤습니다.



초등학생이 초등학생을 추행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은 건 자녀를 둔 부모만이 아니었습니다. 뉴스 댓글을 보니 누리꾼들은 ‘촉법소년(죄를 저지른 만 14살 미만의 형사미성년자) 폐지’, ‘부모와 가해자의 신상 공개’와 같은 강경한 요구를 쏟아내고 있었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지역에 거주하는 특정 계층을 비하하는 발언도 뒤섞여 있었습니다. 놀란 마음은 이해하지만, 선을 넘은 공격과 혐오는 보기 불편했습니다.



가장 많은 댓글은 역시 가해 초등학생의 부모를 향한 비난이었습니다. “집에서 아이를 어떻게 가르쳤길래 아이가 저러냐.” “유해 정보와 음란물이 넘쳐나는 스마트폰 사용을 부모가 통제를 안 해서 그런 거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미성년 자녀를 교육할 일차적인 책임은 부모에게 있습니다. 잘못한 아이의 부모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감정과 행동을 조절하는 능력을 길러주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 욕만 하고 끝내도 될 일인가 싶습니다. 아이들도 수시로 들어가는 유튜브·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선정적인 콘텐츠가 넘쳐나고, 온라인 누리집은 자극적인 광고물로 도배돼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미디어 사용을 단속한다고 막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실제 초등학생 10명 중 4명은 이미 성인물 영상에 노출된 경험이 있습니다. 지난해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2022년 청소년 매체 이용 유해환경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초등학생이 최근 1년간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이나 ‘19살 이상 시청가’로 표시된 영화, 동영상,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본 비율은 40.0%에 이릅니다. 4년 만에 두배로 뛰었습니다. 본격적인 청소년기에 접어든 중학생이 성인물 영상을 시청한 비율(46.1%)과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성인 콘텐츠를 보거나 성에 과하게 몰두하는 일부 아이들을 나무랄 자격이 없는 어른도 많습니다. 어린이날인 지난 5일 경기도의 한 행사장에는 ‘어린이 런치세트’라는 이름의 전시 부스가 마련됐습니다. 어린이가 먹는 음식을 파는 공간은 아니었습니다. 그곳엔 미성년자를 떠올리게 하는 캐릭터가 성적으로 묘사된 전시물이 놓여 있었습니다. 일부는 판매용이었습니다.



논란이 일자 주최 쪽은 “‘어른의 특별존’은 높이 2.4m의 벽으로 막혀 외부와 물리적으로 완벽히 격리돼 있었고 철저한 신분증 검사를 통해서만 입장이 가능했다”며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어린이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공간에 굳이 어린이를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듯한 이름을 붙인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성인을 위한 성인 행사가 아이들과 무슨 상관이냐는 식의 논리는 무척 익숙합니다. 지난달 서울시를 포함한 4개 지방자치단체가 일본 에이브이(AV·성행위를 노골적으로 묘사한 음란물) 배우들이 참여하는 ‘성인 페스티벌’ 개최를 금지했을 때도 주최 쪽은 “미성년자는 출입이 불가하고 신분증 확인 후 들어갈 수 있는 행사”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들은 “대한민국 사람들 첫 경험 나이가 13.6살로 아이들의 성문화는 앞서가고 있는데 부모들만 뒤처지고 있다”고 훈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성을 상품화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아이들의 성 인식을 왜곡시킬 위험이 큽니다. 성관계를 놀이로, 여성을 사고파는 물건으로 대하는 극히 일부 아이들의 생각은 상상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온·오프라인으로 학습한 내용입니다.



성인 페스티벌을 취소했던 주최 쪽은 6월 말, 7월 초 서울의 민간 시설을 빌려 행사를 더 크게 열겠다고 예고했습니다. “(민간 영역에서 열리는) 이런 종류의 공연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오세훈 서울시장의 입장도 재추진에 영향을 준 걸로 보이는데요. 누구도 바꾸려 하지 않는 유해한 세상에서 아이들이 무해하게 자라날 수 있긴 한 걸까요.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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