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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우리는 이 사람 때문에 ‘고도’를 기다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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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연극연출가 임영웅 4일 별세

부조리극부터 사실주의, 뮤지컬까지

소극장 시대 문 연 연출가

“광대를 보며 웃는 우리야말로 인생의 광대”

”연극만이 살아있는 느낌을 준다”

조선일보

‘고도를 기다리며’ 한국 초연 50주년을 맞아 지난 2019년 서울 서교동 소극장 산울림 객석에 앉은 연출가 임영웅. “50년 넘게 고도를 기다린 광대들이 내 모습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조선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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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2월, 국내 처음 소개되는 번역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예고됐다. 스토리가 어렵다고 소문났고, 김성옥, 함현진, 김무생, 김인태 같은 배우는 실력파이긴 하지만, 티켓 파워가 강한 배우들은 아니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공연 일주일 전 티켓이 매진된 것이다. 두 달 전, 원작자 사뮈엘 베케트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덕. 임영웅은 “연극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운(運)은 아니었다. 공감할 스토리를 찾아낸 안목, “세 걸음 걷고 고개를 45도 사선으로 돌려 나무를 쳐다본다” 같은 치밀한 지시, “밤샘 연습을 하고 나면 발바닥이 아파 걸을 수 없을 정도”(김성옥)였다던 노력의 결실이었다. 베케트의 고향에서 열리는 더블린 페스티벌에서 1990년 ‘임영웅의 고도’가 상연된 후, “한국의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는 기다릴 가치가 있다”는 평이 나왔다. 당시 무대에 선 배우 정동환은 그 문장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순정한 연극의 세계로 한국 대중을 이끈 연극연출가 임영웅(林英雄⋅90)씨가 4일 새벽 별세했다. 호적상 1936년생이지만 실제 1934년생인 그는 1955년 ‘사육신’을 연출하며 직업 연출가가 됐다.

서울을 누비던 ‘문화 소년’

서울에서 태어난 임영웅은 조실부모했다. 어머니를 세 살 때, 재즈 밴드를 이끌던 클라리넷 연주자 아버지를 열두 살에 잃었다. 서울예고, KBS교향악단을 창설한 지휘자 임원식이 숙부였다. “할아버지가 용돈을 넉넉하게 줘서, 내가 열두 살부터 시내를 돌아다니며 매식(買食)을 했었어.” 소년은 명동, 종로, 충무로를 자유롭게 쏘다니며 문화의 세례를 받았다. “1950년 국립극장 개관작이었던 ‘원술랑’부터 다 보고. 음악이야 워낙 집에 많았고, 웬만한 문예 잡지도 다 섭렵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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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초연 당시의 '고도를 기다리며'. 구두를 벗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부조리극에서는 구두도 다양한 상징으로 읽힌다. /소극장산울림


휘문중을 다니던 임영웅은 1950년 북한이 점령한 서울에서 인민군에 끌려가기 직전 선배의 도움으로 살아남았다. 1952년 10월, 부산으로 피란 간 휘문고 2학년 임영웅은 거기서 인생을 바꿀 배짱을 부려본다. 전쟁 중 피란지에서 교장에게 “가을 연극제를 해보겠다”고 선언했다. 휘문 출신인 백두진 재무 장관, 소설가 월탄 박종화, 연출가 이해랑의 부친인 외과의사 이근용을 찾아가 기부를 받아 영도의 남도극장에서 ‘전의앙양(戰意昻揚)연극제’를 올렸다.

이 의욕 충만 기획 과정을 임영웅에게 들은 동랑 유치진(1905∼1974)이 말했다. “자네, 연극 공부 좀 하지.” 서울대 상대를 지원했다 낙방한 후 동랑 선생의 말을 떠올려 55년 서라벌예대 연극과에 입학했다. 그해 유치진 원작 ‘사육신’으로 연극판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다. 조선일보 문화부 등 언론사 기자, 동아방송 라디오 PD, KBS PD등을 직업으로 가졌지만, 인생의 핵심 축은 1970년 창단한 ‘극단 산울림’이었다. “살아있는 느낌을 주는 건 연극뿐이었다.”

고도를 기다리며, 사실주의 연극을 팠다

1969년부터 50여 년간 1500회 이상 공연, 관객 약 22만명을 모은 ‘고도를 기다리며’가 그의 대표작이지만 그의 연출작 60여 편의 뿌리는 주로 사실주의였다. 과부들이 사는 산골 마을의 처절한 6·25를 그린 차범석 작 ‘산불’, 그는 무대미술가 박동우와 의기투합해 대나무 200그루를 심고, 무대가 불타는 듯한 효과로 사실주의 연극을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1966년 한국 첫 창작 뮤지컬 ‘살짜기 옵서예’를 비롯, 뮤지컬도 여러 작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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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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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을 수정하지 않는 대신 행간의 의미를 살리려고 ‘수학적’ 접근을 한다. 딸 임수진(산울림 극장장)씨는 “대본에 지시가 빼곡한 건 물론 시선 각도를 의미하는 화살표가 위로, 옆으로, 사선으로 그려져 있었다”고 했다. 배우가 이걸 재연하는 건 쉽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임틀러’ ‘호랑이’는 친근한 이들이 부르는 별명이고, 못 견뎌하는 배우들도 있었다. 임영웅의 오랜 조연출이었던 심재찬 연출가는 “선생님의 이른바 ‘자로 잰 연기’를 특히 신인들이 힘들어했다. 오히려 ‘선수’가 된 연기 잘하는 배우들은 선생님의 의도를 알아 편해했다”고 했다. 서울대병원 빈소에서 만난 여배우들은 “우리에게는 다정한 연출자”라고 했다.

“내가 불평하니까 선생께서 담배도 끊으시던걸”하던 박정자는 86년 흥행작 ‘위기의 여자(원작 시몬 드 보부아르)’ 때 이야기를 했다. “김민자, 김혜자씨 같은 제일 바쁜 여배우에게 요청했다가 다 거절당했어. 내가 한다 해도 안 된다시더니 결국 나더러 하래. 주문은 딱 하나. 박정자는 체온이 80도쯤 되는데, 여기서는 20도로 낮춰줘.” 배우의 강한 자아를 좀 눌러 관객이 ‘각성’할 틈을 주자는 말이었다. 여성 관객 수만 명이 몰려들었다. 배우 손숙은 이렇게 말했다. “1999년 (환경부) 장관을 그만두고 집에서 맥 놓고 있을 때였어. 연극하자시길래 (정치를 했기에) 못 한다 했더니 ‘배우가 연극을 안 하면 뭐 하냐’며 야단하셨어. 그때 ‘그 여자의 작은 행복론’을 하고 나서, 연극이 인생의 전부가 된 것 같아요.” 페미니즘 연극 여러 편도 그의 손에서 나왔다.

60년의 ‘연극 전우’ 오증자

1961년 결혼한 부인 오증자(불문학자·서울여대 명예교수)씨는 임영웅씨 표현대로 ‘전우’, 혹은 동지였다. 오씨가 국내에서 처음 번역한 ‘고도를 기다리며’는 극단 산울림 창단의 기반이 됐고, ‘위기의 여자’ ‘홍당무’ 등 20여 작품을 함께 했다. 마포구 서교동 집을 헐고 1985년 80석 ‘소극장 산울림’을 세운 것도 공연장이 없어 애끓이던 남편을 위한 것이었다. 경영이 어려워도 구조 변경을 못 하도록 그리스 반원형 극장을 콘크리트로 만들었다. 소극장 이름이 버스 정류장 명칭에 들어간 것도 처음이었다. 그래도 연극은 늘 힘들어 임영웅은 주위에 “극장을 폭탄으로 터뜨려 버리겠다”고 하소연도 했다.

에스트라공: “이 지랄 더는 못 하겠다.”

블라디미르: “다들 하는 소리지.”

광대를 보며 웃는 관객이야말로 ‘인생의 광대’임을 깨닫게 하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임영웅은 이 대목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2016년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했고, 2019년 만해대상 문예 부문 대상을 받았다. 연극연출가협회장, 연극협회 이사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지냈다. 유족은 부인 오증자씨, 아들 수현, 딸 수진씨,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이다. 장례는 연극인장으로 치러지며 발인은 7일 오전 9시 마로니에 공원 야외무대, 장지는 서울추모공원이다.

[박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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