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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 (목)

이슈 미술의 세계

21세기 회화의 길, 자연과 PC서 찾은 동서양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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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박영하 '내일의 너'.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을 여는 도전은 늘 추상(抽象)으로 귀결된다. 미술사 거장들도 모두 거쳐간 길이다. 독일과 한국을 대표하는 추상화 대가들의 전시가 열린다. 학고재에서 17일부터 6월 17일까지 열리는 두 개인전을 통해서다.

학고재 본관에서 독일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토마스 샤이비츠(55) 개인전 '제니퍼 인 파라다이스'가 열린다. 4년 만의 한국 개인전에서 신작 추상회화 21점과 조각 2점을 선보인다. 동독 라데베르크에서 태어나 20세에 통일을 경험한 작가는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에 티노 세갈과 독일관 대표 작가로 참여했고, 올해 아트바젤 언리미티드 전시에 참여해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다. 전시장 입구에 걸린 '제니퍼 인 파라다이스'는 무엇을 그렸는지 알쏭달쏭하다. 의자와 선반, 가전제품 등으로 유추되는 도형이 화려한 형광색으로 그려져 캔버스를 입체적으로 분할한다. 제목의 '제니퍼'는 포토샵 개발자인 놀 형제가 1987년 여자친구 제니퍼 사진을 최초로 합성사진으로 만든 데서 따왔다.

작가는 콜라주, 리터칭 등 사진의 변형과 조합을 가능케 한 포토샵의 발명이 21세기 미술에서 피카소의 입체주의와 함께 가장 중요한 혁명이라고 판단했다. 이번 전시 작품들은 전통적 미술사 속 명화, 만화, 게임 등에서 소재를 가져와 포토샵으로 합성해 이미지를 구성한 뒤 아날로그적 회화로 완성했다. 샤이비츠는 "20세기와 21세기 회화를 구분하는 기준은 컴퓨터다. 형광색도 20세기와 전혀 다른 색을 쓰기 위한 도전"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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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샤이비츠 '에픽 게임즈'.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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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 게임즈' 등에 숨어 있는 토끼는 독일 회화사에서 중요한 작가인 알브레히트 뒤러의 '토끼'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작가는 "뒤러의 토끼를 작품에 등장시킴으로써 다중적 시간성을 부여했다. 과거인지 중세인지 현대인지 알 수 없는 시간성의 붕괴가 일어난다"고 했다. 비정형 형광색 도형들의 향연인 신작을 설명하며 작가는 "우리 삶이 도형처럼 반듯하지 않지 않나. 그림 속 도형들이 구불구불한 건 우리 세상도 구부러진 세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학고재 신관에서는 2022년 전속 계약을 맺은 박영하(69) 개인전 '내일의 너'가 나란히 열린다. 회화 34점과 드로잉 8점 등 총 42점을 걸었다. 박두진 시인(1916∼1998)의 3남인 박영하는 1980년대부터 신추상표현주의 회화로 주목을 받아온 중진 작가다. 부친은 아들에게 "'내일의 너'를 화두로 작업해라. 영원히 새롭게 작업하라는 뜻이 담겼다"고 당부했다. 수십 년간 작가가 같은 주제에 천착한 이유다.

"해야 솟아라"라고 노래한 부친처럼 작가가 감화된 대상도 자연이었다.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있는 듯 없는 듯 현미무간(顯微無間)의 세계를 화폭에 담아낸다. 자연은 스스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운영한다. 박영하가 지향하는 그림이 그렇다. 작가가 직접 개발한 안료는 최대한 자연의 색과 가까운 빛을 뿜어내며, 작가는 자연의 시간을 담기 위해 캔버스에 안료를 거듭해서 쌓아 올린다.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두꺼운 마티에르의 회화 속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늬가 숨어 있다. 박 작가는 "돌일 수도 나뭇가지일 수도 있다. 자연적으로 생겨난 흔적들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작업실 바닥에 눕혀 둔 캔버스를 걸어다니며 작업한다. 물감을 덧칠해 질감을 만드는 기초작업부터 한다. 그리고 지켜보다 완성된 작업은 옆으로 치운다. 10점을 깔고 작업하면 3~4개는 차분하고 무채색에 가까운 형태로 귀결된다. 박 작가는 "추상의 매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완성된다는 느낌이 아니라 그릴수록 끝이 없다는 점이다. 붓을 놓을 때도 완성의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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