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을 넘지 못한 빈약한 서사
성장 서사ㆍ관계 유기성도 부족
사라진 감정 연기ㆍ낯선 연출도
국내에 유럽 뮤지컬 열풍을 몰고 온 ‘레베카’, ‘마리 앙투아네트’, ‘엘리자벳’을 만든 세계적인 ‘뮤지컬 콤비’인 극작가 미하엘 쿤체와 작곡가 실베스터 르베이가 7년에 걸쳐 매만진 신작 ‘베토벤’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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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사랑의 결말이 갑작스럽다. 베토벤은 위대한 음악가이기 보다 자기연민과 비하에 빠진 외골수, 거기에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다)처럼 보인다. 그 사랑은 심지어 불륜이었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사랑은 객석과의 공감대를 쌓진 못했다. 그 와중에 베토벤은 ‘금지된 사랑’을 찬양하고, “나의 음악도 달라질 것”이라며 행복에 취하니 객석과는 자연히 거리가 멀어졌다. 불온한 러브 스토리는 섬세한 감정선이 더해지지 못해 결국 설득력을 잃었다. 개막 전만 해도 2023년 ‘최고의 기대작’이었던 뮤지컬 ‘베토벤’(3월 26일까지·예술의전당)은 하루 아침에 ‘요란한 빈 수레’가 됐다.
‘베토벤’은 개막 이전부터 화제를 모은 작품이었다. 박효신·옥주현·박은태·카이 ·조정은 등 화려한 캐스팅에 ‘레베카’, ‘엘리자벳’, ‘마리 앙투아네트’ 등 국내 스테디셀러 뮤지컬을 만든 ‘거장 콤비’ 미하엘 쿤체(극작)와 실베스타 르베이(작곡)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불굴의 의지’로 고난을 극복한 인간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은 워낙 ‘매력적인 소재’이기에 작품 자체에 대한 기대감도 높았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연 뮤지컬은 ‘매서운 잣대’의 표적이 됐다. 인터파크 평점 기준 7.5점. 보통 대극장 뮤지컬이 9점 대의 평점을 유지하는 것을 고려하면 관객 평가가 매우 박하다.
뮤지컬은 익히 알려진 ‘위대한 작곡가’가 아닌 ‘보통의 인간’ 베토벤에게 집중한다. 이야기는 베토벤이 죽은 뒤 발견된, 부치지 못한 ’세 통의 편지‘에서 출발한다. 편지는 1812년 7월 6, 7일에 쓰여졌다. 뜨거운 사랑을 고백한 편지의 주인공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다.
‘베토벤’은 이런 이유로 1810~1812년으로 시대를 특정해 40대 초반의 베토벤과 관객의 만남을 시도한다. ‘불멸의 연인’ 후보는 안토니 브렌타노. 조금씩 청력을 잃어가던 시절, 음악밖에 모르던 괴팍한 작곡가 베토벤은 안토니 브렌타노를 통해 구원받고 치유받으며 불멸의 음악 세계를 만들어간다.
뮤지컬 ‘베토벤’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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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약한 서사·허술한 유기성혹독한 평가의 핵심은 바로 ‘빈약한 서사’다.
사실 국내 뮤지컬 시장에선 그간 ‘영웅 서사’가 꾸준히 사랑 받았다. 실존 인물이든, 가상의 인물이든 고난과 역경을 극복한 주인공의 서사는 공연 시장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2030 관객들에게 사랑 받는 요소 중 하나였다.
베토벤은 남녀노소 모두가 알고 있는 ‘영웅담의 주인공’이다. 청력을 잃어버린 음악가라는 설정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일부러 쓰기도 힘든 상투적인 비극이다. 그런데 이 극적인 상황이 ‘실제 역사’이니, ‘베토벤’은 어느 정도 성공 요인을 갖춘 작품이었다. 그러면서도 ‘사랑’에 초점을 맞춘 것도 흥미로웠다. 세기의 음악가가 ‘뮤즈’를 발견한 이야기라니…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베토벤’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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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제는 ‘이야기의 밀도’였다. 베토벤과 그의 뮤즈 '토니'와의 첫 만남은 이렇다. 허름한 행색에 구부정한 자세, 괴팍한 성미로 귀족 사회에서 무시당하기 일쑤인 베토벤. 그런 베토벤에게 유일하게 손 내민 사람이 토니였다. 겉모습이 아닌 그의 음악성을 알아본 유일무이한 존재다. 하지만 뮤지컬에선 베토벤과 각별한 존재와의 만남, 만남의 의미, 사랑에 빠져드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베토벤과 토니의 사랑에 대한 맥락만 부족한 게 아니다. 베토벤의 성장 서사, 인물 간 서사의 유기성도 허술하다. 음악의 가치에 대한 존중 없이 모멸감을 안기는 귀족과의 대립에서 베토벤은 맞서기 보단 회피한다. 베토벤 대신 맞선 사람이 안토니다. 본인의 의지로 상황을 극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존 영웅 서사와 다른 점이다.
뿐만 아니라 어린시절 아버지의 학대, 그로 인한 가족의 갈등, 그 안에서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한 형제의 모습이 충실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베토벤과 동생 카스파의 갈등은 등장하나, 각각의 스토리가 긴밀하게 엮이지 않아 뜬금없는 전개처럼 다가온다. 때문에 “베토벤과 달리 사랑과 결혼으로 일상의 행복을 택한 동생 카스파의 삶이 베토벤이 토니와 사랑에 빠지는 트리거 역할이 됐다면 두 사람의 만남이 불륜으로만 보이진 않았을 것”(지혜원 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이라는 전문가 분석이 나온다.
박효신 옥주현 등 뮤지컬계 톱스타들이 출동한 ‘베토벤’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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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된 감정연기·낯선 연출납득하기 어려운 사랑 이야기일수록 배우들의 섬세한 감정 연기는 필수다. 서사의 빈틈을 채울 수 있는 것이 바로 디테일한 감정선이기 때문이다.
지혜원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는 “다른 대극장 작품과 달리 ‘베토벤’은 얽히고 설킨 인물 관계가 아닌 두 사람의 감정이 중요한 작품인데, 디테일한 감정선이 느껴지지 않으면 관객들이 지루해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캐스트 조합에 따라 상황은 다르다. 하지만 이름값 하는 배우들은 섬세하게 주고 받는 감정 연기가 아닌 힘겨루기를 방불케 하는 노래 자랑 같은 무대를 보여줘 관객 설득에 실패한다.
촘촘하지 못한 설정도 아쉽다. 인물들의 사소한 상황 설정은 캐릭터의 서사를 쌓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 작품에선 토니와 베토벤이 재회할 수 있었던 계기, 사랑이 불타오르는 시점을 둘러싼 환경이나 인물들의 변화를 보여주지 않아 온전한 사랑 서사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감정을 끌어내 촘촘히 엮어줘야 할 연출도 기존의 뮤지컬 문법과는 달라 낯설었다. ‘베토벤’의 연출은 ‘슴슴한 평양냉면’의 맛이다. 배우들의 몸짓, 표정을 살려낸 집요하고 디테일한 접근 대신 담백함을 택했다.
고난을 이겨내는 과정에서의 격정적인 포효와 아찔한 고음의 넘버 등 ‘마라맛’을 가미한 기존 ‘영웅서사의 매력’을 살린다면 관객 설득에 보다 수월했을 수 있다. 하지만 작품은 많은 부분에서 덜어냈다. 정공법을 택했고, 무대 연출보다는 영화의 문법을 더 많이 따랐다. 한국 뮤지컬은 처음으로 연출한 길버트 매머트는 “뮤지컬적인 형식 안에 영화적인 장면들처럼 씬(Scene)들이 구성돼 있다”고 말했다.
‘베토벤’ [EMK뮤지컬컴퍼니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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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뮤지컬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무대 전환이 그대로 노출되는 영화적 기법의 연출은 우리나라 대극장에선 익숙하지 않은 연출 방향”(지혜원 교수)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처럼 이 작품의 낯선 작법(作法)들로 인해 익숙한 ‘뮤지컬 문법’을 기대한 관객들은 교감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친숙한 것은 음악 뿐이다. 베토벤의 원곡과 필요에 따라 어우러진 현대적 멜로디의 조화로움이 작곡가의 노고를 느끼게 한다. 하지만 호오(好惡)는 갈렸다. 음악은 ‘너무도’ 익숙한 것의 변주였던 탓인지, 비난의 과녁에 서게 됐다. 특히 ‘엘리제를 위하여’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한국인에겐 워낙 익숙한 멜로디이다 보니, 발랄하게 태어나 주선율에 한국말로 노래하는 넘버는 새삼 ‘생경한 광경’으로 다가왔다.
다만 이 작품이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초연작이라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베토벤’의 발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보는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다. 원종원 순천향대 공연영상학부 교수는 “국내 뮤지컬 계는 인기작을 번안해서 올리는 작품 위주의 시장이다 보니 초연부터 높은 완성도를 기대하나, 사실 공연은 처음부터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며 “약간의 시간과 여유를 두면서 작품이 성장할 수 있는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혜원 교수 역시 “‘베토벤’이 시도하는 기존 뮤지컬 문법과는 다른 낯섦이 관객에게 와 닿지 않는 데다 물가 상승 등의 요인으로 인한 티켓 가격의 상승 부담은 다양한 관객 반응을 나오게 한 요인이 됐다”며 “아쉬운 부분을 보완하며 발전해나갈 수 있는 작품이 되리라 본다. 검증된 작품이 주로 오르는 대극장 뮤지컬 안에서 ‘베토벤’과 같은 창작 의지는 계속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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