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개봉하는 영화 <애프터 미투>의 박소현(43)·이솜이(32)·강유가람(43)·소람(31) 감독. 이주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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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세상이 화면 가득 펼쳐진다. 다만, 노란색 포스트잇만이 그 고유의 색을 내고 있다. 학교 안에서는 아이들이 떠드는 목소리가 들리고, 서늘한 분위기의 글씨가 화면 위로 떠오른다.
‘여고괴담.’
최근 보도된 뉴스는 이 제목을 곱씹게 한다. 전국 초중고에서 학생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가해 교사(2018년 1월~2022년 9월) 542명 가운데 137명(25.3%)이 교단에 남아있다고 한다.
6일 개봉하는 옴니버스 다큐멘터리 영화 <애프터 미투>는 박소현(43)·이솜이(32)·강유가람(43)·소람(31) 감독이 모여 2018년 미투 운동 이후 사회 곳곳 여성의 삶을 조명한 작품이다. 감독들은 각각 스쿨 미투(여고괴담), 성폭력 트라우마(100.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 예술계 미투(이후의 시간), 성적 자기 결정권(그레이 섹스)을 다룬다.
첫 번째 에피소드 ‘여고괴담’을 만든 박소현 감독은 “왜 교내 성폭력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지를 고민했다. 구조적인 부분을 들여다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여고괴담’은 스쿨 미투 운동의 시작이 된 서울 노원구 용화여고 이야기다. 영화는 용화여고 학생들이 찍은 학교 사진을 흑백 배경으로 두고, 당시 학생들이 녹음한 목소리와 최근 증언을 담았다. 한 학생이 포스트잇을 붙이는 다른 학생에게 “너 정말 용감하다”고 말한다. 다른 학생은 별것 아니라는 듯 답한다. “너도 해.” 그 말을 들은 학생은 노란색 포스트잇을 집어 든다. 용기 있는 행동을 알아보는 눈, 방관하지 않는 학생들이 스쿨 미투를 만들었다고 영화는 보여준다.
박 감독은 “한국 제도권에서는 튀는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크다. 그런 맥락에서 ‘너도 할 수 있다’는 말과 그것을 실현한 행동이 감명 깊었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지난해 9월30일 용화여고 성폭력 가해 교사에 대한 징역 1년6개월 선고를 확정했다. 취업 제한은 5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삶을 꿋꿋이 살아내고 있다”
‘100.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졌다’는 성폭력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50대 여성의 이야기다. 이솜이 감독은 “‘미투’(Me Too·나도 말한다)라고 하면 떠오르는 핵심 사건이 몇가지 있다. 그건 언론 등에서 꽤 얘기가 됐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말하고 싶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 목소리를 끌어올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주인공인 ‘행복’씨는 매일 노트에 같은 문장을 백번 적는다. 자신의 바람을 꾹꾹 눌러 담는다. “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해진다.” 행복씨는 마이크와 스피커를 들고 피해 장소를 찾아간다. 넓은 들 한가운데서 그는 외친다. “나는 나를 용서한다.” 이솜이 감독은 “영화에는 몇 분으로 들어갔지만 실제론 서너 시간 동안 말했다. 무언가 게워낸다는 느낌이었다. 다 말한 뒤 행복씨가 남겼던 큰 한숨이 기억난다”고 했다. 행복씨는 말한다. “나는 73년생이다. 지금은 49살이다. 피해를 말하게 된 건 40살이 되던 해이다. 성폭행 당했을 때 나는 아홉 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남은 삶을 꿋꿋이 살아내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와 연대하는 활동가는 늘 투쟁의 언어로 기억된다. 이들이 가진 한 사람으로서의 고민은 드러나지 않는다. 강유가람 감독은 ‘이후의 시간’에서 예술계 미투 활동가의 고민을 따라간다. 강유가람 감독은 “연대자는 성폭력 사안만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각자 인격을 가진 존재다. 하지만 사회는 관련 사안을 해결하는 완벽한 주체가 있는 것처럼 바라본다”고 지적했다.
6일 개봉하는 영화 <애프터 미투> 포스터. |
영화 속에서 연대자들은 고민을 털어놓는다. 예술계 종사자는 회사원처럼 한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회사로 갈 수 없다. 그래서 목소리를 내기 더 어렵다. 문화예술계 성폭력 대응 활동가인 송진희 미술 작가는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동료들과 ‘부산문화예술계 반성폭력 연대’를 만들고 지원 상담을 하고 있다. 송 작가는 “미투 전과 후는 다른 삶을 사는 것처럼 너무 많이 변했다”고 말한다. 작가이면서 연대자로, 성폭력 피해자와 연대를 이어가지만 커리어가 단절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아야 했다.
하지만 송 작가와 같은 연대하는 사람이 있어서 피해자는 일상을 회복하고 피해를 극복해 나간다. 강유가람 감독은 “성폭력 사건 자체를 가해자와 피해자의 문제로만 봐선 안 된다. 공동체가 다 같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제3자가 성폭력 사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영화 <애프터 미투> 작업에서 중요한 화두였다”고 했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소람 감독의 <그레이 섹스>다. 욕망에 솔직했으나 그 후 불쾌감을 느낀 여성들의 여러 감정의 결을 다룬다. 여성이 자신의 성적 욕망에 솔직하기는 쉽지 않다. 성적 욕망과 성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부딪힌다. 성관계 중에도 수많은 폭력에 노출되고 그때마다 질문에 부딪힌다. ‘지금 기분이 나쁜데,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가?’ 여성들은 고민하다가 결국 감정을 무시한다. 소람 감독은 “모호한 상황, 모호한 감정이 많다. 많은 여성이 속으로 의문을 가지는데, 자신의 감정이 맞는다는 걸 받아들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고 싶은 말은 내가 꼭 하고야 말 거요 ”
소람 감독은 “자신이 그때 힘들었고 비참했고 상처받았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이걸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자신이 처한 상황이 ‘굿’인지 ‘배드’인지 판단할 수 없는 ‘회색지대’가 돼 버린다”며 “감정을 들여다보고 나를 탓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안전한 섹스 문화를 만들기 위해 이에 대해 더 많이 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화 <애프터 미투>는 이렇게 시작한다. 검은 화면에 흰 글자가 하나씩 새겨진다. “신문에 나고 뉴스에 나오는 걸 보고 내가 결심을 단단하게 했어요. 아니다. 이거는 바로 잡아야 한다. 그래서 결국 나오게 되었소. 누가 나오라고 말한 것도 아니고 내 스스로. 나올 때 좀 무서웠어요. 죽어도 한이 없어. 하고 싶은 말은 내가 꼭 하고야 말 거요. 언제든지 하고야 말 거니까.” 1991년, 당시 67살이던 고 김학순씨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이렇게 처음 밝혔다. 강유가람 감독은 말한다. “미투 운동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게 아니에요. 오래전부터 여성들은 말해왔어요.” 영화 포스터 속 문구가 영화를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아직 할 말이 너-무 많다!”
이주빈 기자 y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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