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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금)

콜로세움의 막시무스처럼…“진보정치, 보통사람 마음을 얻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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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검투사 막시무스(가운데)는 콜로세움의 관중, 즉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 황제(왼쪽)에 맞서 승자가 된다. 영화 ‘글래디에이터’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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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검투사 막시무스가 콜로세움의 관중, 즉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얻어 황제에 맞서 승자가 되는 과정이다. 과거 검투사였던 노예상 프락시모가 검투를 앞두고 그에게 이런 말을 던진다. “내가 최고였던 건 상대를 재빠르게 죽였기 때문이 아니라 관중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관중의 마음을 얻어라. 그러면 자유를 얻을 것이다.” 목표를 이루려면 경기를 지켜보는 보통사람들의 마음을 얻으라는 얘기다.



이길 수도, 질 수도 있는 것이 선거다. 늘 지는 정당은 있어도 늘 이기는 정당은 없다. 정당에는 승리나 패배 모두 일상이다. 사실 성패가 뒤바뀌는 게 민주주의다. 그럼에도 어떻게 졌는지는 가혹하게 따져봐야 한다. 초점은 패배 그 자체보다 패배의 질이다. 미국 민주당은 유권자, 특히 자신이 대표하고 대변하겠다고 한 노동자 등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마음을 얻지 못해 졌다. 미국 민주당의 패배는 ‘남 얘기’가 아니다. 진보를 표방한, 약자나 보통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겠다고 약속하는 정당이라면 깊이 성찰해야 할 역사적 사건이다.



미국 민주당은 져도 빈틈없이 알차게 졌다. 4년 만에 백악관을 내줬을 뿐만 아니라 상원과 하원도 모두 잃었다. 대통령 선거인단에서는 226 대 312로 완패했다. 지도로 보면 대서양과 태평양 연안의 파란색을 빼면 온통 빨간색이다. 11월20일까지의 개표를 기준으로, 상원은 52 대 46, 하원은 218 대 212로 공화당이 승리했다. 이른바 ‘트라이펙타’ ‘레드 스윕’을 달성했다.



민주당에 가장 뼈아픈 대목은 일반 투표에서의 패배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게 생겼다. 근래 대선에서 패배했을 때마다 민주당은 ‘중 염불하듯’ 제도 탓을 했다. 일반 투표에서 이기고도 선거인단 득표에서 졌기 때문이다. 2016년, 힐러리 클린턴은 일반 투표에서 280만표를 더 얻었다. 2020년, 조 바이든은 일반 투표 700만표 우위에도 불구하고 경합주에서 근소하게 앞서 승리했다. 그랬던 민주당이 이번에는 일반 투표에서도 500만표 뒤졌다. 전통적 지지층이 먹고 사는 건 나 몰라라 하면서 성마른 ‘B사감’처럼 훈계만 하는 민주당에 실망해 떠난 탓이다. 그 결과 2020년에 비해 대졸 미만 저학력층, 연 소득 5만달러 이하 저소득층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지지율이 각각 4%포인트, 5%포인트 늘어났다.



미국 민주주의가 퇴행한 이유를 반 다수결 제도에서 찾았던 학자들도 머쓱하게 됐다.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선거인단 제도가 다수결에 반한다며 미국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제안한다. 그들은 꼭 필요한 개혁의 하나로 선거인단 제도의 폐지를 꼽는다. “선거인단 제도를 폐지하고 이를 전국적인 보통 선거로 대체해야 한다.”(‘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다수가 권력을 차지하고, 그들이 강력하게 통치할 수 있게 하자는 구상이 그들의 개혁 비전이다.



그런데 트럼프가 당선되자마자 다수파로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는 상원의 장관 인준 권한과 예산 편성권을 손보겠다고 한다. 일반 투표에서도 크게 승리한 트럼프가 다수결의 논리로 자신의 어젠다와 프로그램을 밀어붙인다니 그간 공화당이 소수임에도 전횡을 일삼아온 걸 비판하며 다수 지배를 강조한 이들로선 난감하게 됐다.



민주당의 패배에 대한 원인 분석이 쏟아지고 있다. 그중에서 민주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일갈이 가장 통렬하다. “민주당의 선거 참패는 놀라울 게 전혀 없다. 민주당은 투표장에서 자신이 먼저 버린 노동계급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지난 선거에서는 백인 노동자들의 표를 잃더니, 이번에는 라틴계, 흑인 노동자들의 표까지 잃었다. 미국인들은 지금의 부조리에 분노하고 변화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당 지도부는 현상 유지를 우악스럽게 고집했다. 유권자들의 선택은 옳았다.” 얘기 끝!



전조 없는 사고는 없다. 민주당이 백인 노동자들의 마음을 잃고 있기 때문에 매우 불리한 상황이라는 지적은 선거 오래 전부터 끊이지 않았다. “중국과의 자유무역으로 인해 발생한 계급·문화적 분노는 이제 백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내재화되고, 자생력을 갖게 됐다. 여기에는 기술·문화·정치적 요인도 있었다. 산불처럼 지금 백인 노동자들의 분노와 불만은 계속해서 스스로 바람을 일으켜 불씨를 날라 사방으로 퍼뜨리고 있다.” 매사추세츠공과대(MIT) 경제학 교수인 데이비드 오터의 대선 2년 전 진단이다.



하버드대 도시정책학 교수인 고든 핸슨도 그 즈음 비슷한 지적을 했다. “민주당은 지금 자유무역과 동의어나 다름없는 정당으로 인식되고 있다. 빌 클린턴 대통령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밀어붙였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성사를 위해 안간힘을 썼다. 모두 제조업 일자리를 앗아간 주범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들이다.”
자신들이 지지한 정당이 그 일자리를 빼앗은 꼴이니 그들로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가슴 속 응어리를 트럼프가 콕 집어 자극했다. “여러분에겐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지 않습니까?”



이런 형편에도 바이든 정부는 많이 부족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불평등을 시정하기 위해 노동자의 편에 서겠다는 공약을 실천에 옮겼다. 그래서 나도 바이든 대통령을 지지해 왔다. 그러나 민주당이 당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걸 다 했냐고 묻는다면 노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최저임금을 올리는 문제나 의료보험 부담을 줄여주는 문제는 계속해서 정책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샌더스의 평가다. 그래서 그는 “유권자들이 트럼프에게 기대하게 되는 건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했다.



카멀라 해리스 선거 캠프 역시 안이했다. 배고파 우는데 클래식 음악 틀어주는 ‘공제’(공감능력 제로)도 기가 차는데, 클래식 음악을 모른다고 또 힐난하는 식이었다. 대선이 막바지로 접어들던 지난 10월 오바마 전 대통령이, 해리스에게 유보적인 흑인 남성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혹시 여성을 대통령으로 뽑는 게 불편한 건 아닌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 미국은 인종 갈등으로 내전까지 치른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사상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된 그조차도 불씨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어쩌면 알고 싶지 않을지도….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던지 칼럼니스트 브렛 스티븐스가 이렇게 비꼬았다.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의 자료에 따르면, 흑인 정규직 노동자의 임금은 트럼프 재임 중에 가파르게 오르다가 바이든 행정부 아래서는 거의 정체됐다. 이렇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는 설명을 놔두고 굳이 누군가를 꾸짖고 모욕 주는 논리를 찾는 이유는 뭘까?”



‘소셜 애니멀’의 저자인 데이비드 브룩스는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이렇게 직격했다. “민주당에 주어진 임무는 단 하나, 불평등과 싸우는 것이다. 바로 눈앞에 이토록 극심한 불평등이 보란 듯이 존재하는데, 많은 민주당 사람들은 이를 보지 않았다. 많은 좌파가 인종 불평등, 젠더 불평등, 성소수자 불평등에 집중했다. … 좌파가 정체성 행위예술로 방향을 트는 사이 트럼프는 두 발 벗고 계급전쟁에 뛰어들었다. 퀸즈 출신 트럼프의 맨해튼 엘리트에 대한 분노는 미국 전역의 시골 사람들이 느끼는 계급적 적개심과 마법처럼 맞아 떨어졌다. 트럼프의 메시지는 간단했다. 이 사람들은 당신을 배신했을 뿐만 아니라 무식한 얼간이로 여긴다.”



민주당의 패배가 진보정치에 주는 교훈은 간단명료하다. 관중의 마음을 얻어라!



한겨레



이철희 | 방송에서 정치평론을 하다 정치에 나서 20대 국회의원, 문재인 정부 마지막 정무수석을 지냈다. 2020년 ‘대통령 탄핵 결정요인 분석: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과정 비교’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인자를 만든 참모들’ ‘정치가 내 삶을 바꿀 수 있을까’ 등의 책을 냈고, ‘진보는 어떻게 다수파가 되는가’ 등의 역서가 있다. 우리 정치가 어쩌다 이렇게 나빠졌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야 나아질 것인지 등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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