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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금)

“교단에 서는 게 부끄럽다”…‘나는 왜 시국선언에 이름을 올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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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김진해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김진희 경희사이버대 미국문화영어학과 교수, 민유기 경희대 사학과 교수. 고나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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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학교 주변 한 카페에 수업을 마친 교수 8명이 모였다. 이른바 ‘명태균 게이트’와 국정농단 의혹 보도가 쏟아지던 저녁이었다. 그 자리에서 김진희 경희사이버대 교수(미국문화영어학과)는 생각했다고 한다. “민주주의가 뿌리째 흔들리는 현 상황에서 ‘가르쳐야 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괴리를 느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다시 교단에 서는 게 부끄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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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선언 참여한 대학과 교수, 시국선언 속 주요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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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희 교수와 민유기 교수(사학과), 김진해 교수(후마니타스칼리지), 장문석 교수(국어국문학과) 등 인문학 교수들이 펜을 들었다. “나는 폐허 속을 부끄럽게 살고 있다”는 문장이 첫 문장으로 쓰였다. 초고를 나눠 보며 문장을 가감하고, 온라인 서명 주소를 전하고, 전자우편을 보냈다. 지식인으로 불리며 강단에 선 ‘나’의 부끄러움을 주제 삼은 2천여자 시국선언문에 동료 교수·연구자들은 “기다린 듯” 응답했다. 이틀 만에 226명이 연명했다. 지난 13일 발표된 경희대·경희사이버대 교수·연구자들의 시국선언문은 “인간의 존엄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는 윤석열 대통령은 즉각 퇴진하라”고, 끝내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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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서울 동대문구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 문과대학 건물에 경희대·경희사이버대 교수 및 연구자들의 시국선언문이 붙어 있는 모습. 고나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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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이 봇물 터진 듯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28일 가천대 교수노조의 시국성명을 시작으로 21일 저녁 7시 기준 전국 30개 대학과 지역에서 3400여명의 교수·연구자들이 시국선언에 참여했다. 김용련 한국외국어대 교수(사범대)는 “교수 시국선언은 한국 현대사에서 더 이상 여지가 없을 때 터져나오는 지식인들의 종지부 같은 것이었다”며 “최근 교수 시국선언은 이전과 달리 시민사회 움직임에 견줘서도 빠르게 나오는 분위기인데, 릴레이처럼 이어지고 있어 향후 이 흐름이 집결되면 큰 폭발력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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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경북대학교 교수·연구자들이 19일 오후 대구광역시 북구 경북대 북문 앞에서 시국선언 발표 및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의 말을 듣지 않는 대통령은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며 윤석열 대통령을 규탄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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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진’이라는 단어를 적기까지, 교수들은 켜켜이 쌓인 위기감이 있었다고 토로했다. 민유기 경희대 교수는 “사회적 참사라 이를 만한 일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는데 그에 대한 정부의 대응과 해명이 없어 사회적 트라우마가 커진 상태에서, 명태균씨 의혹과 관련한 대통령 녹취까지 공개됐다. 이제는 ‘어떤 선을 넘어섰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거의 모든 대학 시국선언이 최근의 국정농단 의혹뿐 아니라 이태원 참사, 채 상병 사건, 역사 왜곡, 대북 정책, 부자 감세, 의료 대란 등을 두루 문제 삼은 배경이다.



특히 공동체 기반이 되는 ‘자유’, ‘민주주의’ 후퇴에 대한 공포가 컸다. 안승택 경북대 교수(인류학)는 “대학은 자유로운 말이나 행동이 얼마든지 가능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곳인데 그 가능성이 위협받는 것이 체감됐다”고 했다. 안 교수가 경북대 시국선언문에 카이스트 졸업식의 ‘입틀막’ 장면을 전하며, “대단히 상징적이며 놀라운 사건”이라는 문장을 적어 넣은 이유다. 경북대 시국선언에는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요구 당시 참여 인원(88명)의 2배가 넘는 179명이 참여했다.



교수들에게 시국선언은 지식인으로서 ‘부끄러움’과 ‘의무감’을 고백하는 일이기도 했다. 191명이 동참한 강원 지역 시국선언을 준비한 박현숙 한라대 교수(교양과정부)는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상황에서, 미래를 만들어 갈 학생들을 가르치는 대학교수들이 묵과하고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모였다”고 말했다. 부산·울산·경남 지역 대학 교수 시국선언(624명 참여)을 이끈 원동욱 동아대 교수(국제학부)도 “교수가 기득권의 일부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사회의 아픔, 위기에 대해서조차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쓰지 못한다면 지식인 자체를 포기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함께한 교수님들이 많다”고 전했다.



그렇게 나온 ‘대통령 퇴진’ 구호가 단순한 분노를 넘어 한국 사회 현실을 고민하고 논의하는 질료로 쓰이길, 교수들은 바랐다. 김진해 경희대 교수는 “분노는 목표를 분명하게 하지만 시야를 좁게 만든다. 조금 더 길고 넓은 안목으로 사회에서 점검해야 할 부분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경희대 시국선언문이 “우리는 이제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며,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면서 만들어갈 우리의 삶이 어떠한 삶일지 토론한다”는 다짐과 바람을 적은 이유다. 민유기 경희대 교수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겪으며 우리는 민주주의가 굳건하다는 걸 한번 확인했지만, 이후 전면적인 사회 대전환의 논의가 없었다. 집단적 논의도 퇴진 요구와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교수들의 시국선언은 매일같이 이어지고 있다. 21일 동국대(108명), 연세대(177명), 이화여대(140명), 조선대(교수 147명, 직원 50명), 한신대(58명)에서도 윤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교수들의 시국선언문이 발표됐다. “편 가르기와 파행적 인사,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혐오의 정치로 인해 연대 의식은 사라지고 공동체는 무너진”(연세대) 폐허 앞에, ‘부끄럽게 살 수 없는’ 지식인의 외침이 날마다 커지고 있다.



고나린 기자 m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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