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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6 (일)

이슈 5·18 민주화 운동 진상 규명

5·18진상조사위 “‘광주역 발포 지휘 있었다’ 진술 다수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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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1980년 5월 20일 광주역 일대의 집단 발포가 우발적인 것이 아닌 당시 제3공수여단장의 현장 지휘에 따른 것이라는 증언이 나왔다.

조선일보

송선태 위원장이 12일 서울 중구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 열린 대국민 보고회에서 경과 보고를 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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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는 12일 서울 중구의 위원회 대강당에서 대국민 정례 보고회를 열고 당시 발포 명령·체계의 조사 주요 경과를 발표했다.

조사위는 현장 작전에 참여한 계엄군 530명에 대한 방문 조사를 실시, 최모 당시 제3공수여단장이 광주역 현장에서 지휘했고 그가 무전으로 발포승인을 요청했다는 진술 등을 확보했다. 지금까지는 광주역 발포에 대해 박모 대대장 등이 시위대 차량 공격을 저지하느라 차량 바퀴에 권총을 발사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는 박 대대장 본인 수기 기록에 의한 것이어서 신빙성에 한계가 있었다.

조사위는 최근까지도 1980년 5월 20일 광주역 일대 발포와 다음날인 5월 21일 도청 앞 집단 발포에 대해 집중적인 조사를 벌여왔다. 광주역 일대의 집단 발포는 계엄군의 공식적인 발포 명령(자위권 보유 천명)보다 하루 먼저 일어났다.

조사위는 “여러 진술을 바탕으로 현장 지휘관의 독자적 판단에 의한 발포가 아니라 별도의 명령계통에 의해 광주역 집단 발포가 있었는지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송선태 위원장은 이날 기자들과의 질의답변에서 “여단장의 리볼버 권총 3발을 신호로 발포가 시작됐다고 3여단의 작전 관련 장교들, 하사관과 병의 증언이 있었다”며 “동시에 이걸 부인하는 내용도 있어서 사실관계를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사위 측은 광주역 일원의 시위대뿐만 아니라 주택가·상가에도 발포가 있었다는 진술, 주변 병원 진료기록으로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은 피해자가 발생한 사실도 확보했다.

한편, 조사위는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게 살해됐다는 시민군 ‘김군’이 차모(61)씨로 확인됐고 현재 생존해있다고 밝혔다. 이로써 김군이 북한군 ‘광수 1번’이며 북한군이 5ㆍ18민주화운동에 개입했다고 주장해온 보수 인사 지만원씨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김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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