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1 (화)

K-시골의 흔한 겨울나기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농번기보다 농한기에 더 바쁜 농부이고자 합니다. 낮에는 밭을 일구고 밤에는 글을 쓰고 싶다 생각했지만서도, 귀농해야겠다는 결심에 가장 보탬이 된 건 ‘겨울'이었어요. 겨울이 되면, ‘이걸 해보자, 저걸 해보자' 하며 온 가족이 머리를 모아 하고 싶은 일을 궁리해보면 어떨까요.

한겨레

[엄마아들 귀농서신] 선무영 | 시골로 가려는 아들·로스쿨 졸업

초겨울이 좀 따뜻하다 싶었는데, 마지막 달에 들어서니 금세 추워졌습니다. 퀴퀴한 좀약 냄새를 헤치고 롱패딩을 꺼냈어요. 어머니 잔기침은 좀 나아지셨는지 걱정입니다. 올해 초, 추웠던 겨울이죠. 마지막 변호사 시험 치르고 나서 아내와 함께 괴산에 갔습니다. 아버지는 고생했다며 고기를 구워주겠다 하셨어요. 가스 불에 해 먹어도 충분한데, 꼭 숯불구이를 해주시겠다며 불을 피우셨죠. 그렇게 마당에서 거실까지 몇번이나 날라 주시는 고기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고기를 든든히 먹고 나서 온 가족이 마당에 피워놓은 불 앞으로 모였습니다. ‘불멍'이었죠. 가끔 타닥타닥 불씨가 튀어 패딩에 구멍이 날까 봐 걱정되긴 했지만, 너무나 따뜻한 겨울이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방학'이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봄 학기가 끝나면 여름방학, 가을 학기가 끝나면 겨울방학이었어요. 다음 학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자유로운 시간이었습니다. 못 읽던 대하소설도 몰아 읽고, 시간이 필요한 공부를 하거나, 여행을 가기 좋은 때였습니다. 이런 방학이 좋아 보여서 한동안, 선생님이 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죠. 그런데 일을 한 지 10년이 되어가는 아내는 그런 ‘방학'을 가져본 지 오래됐습니다. 휴가를 내는 것도 잠시, 다시 회사로 돌아갑니다. 용기를 내서 사표를 집어던지더라도 금세 다른 자리를 찾아가야 했죠.

시골의 겨울은 사뭇 달라 보입니다. 절임 배추로 이름난 괴산이라도 김장철이 지나면 한가해 보여요. 벼를 기르느라 힘들었을 논도 겨울에는 쉽니다. 특별히 한 해 쉬게 해주기도 하는데, 그걸 휴경기라고 한다고요. 어머니는 휴경기 이야기를 하시다 사실은 일굴 사람이 없어서 마냥 땅을 놀리기도 한다며 한숨 쉬셨죠. 종신직을 따내신 교수님들이 이런 휴경기를 가지는 걸 본 적 있어요. 안식년. 또는 더 전문적인 공부를 위해 연구년에 떠나시기도 하고요. 훌륭한 나무를 길러내기 좋은 땅이 되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방학'이라 생각합니다.

어렸을 때, 교회에 다녀오는 길이면 논에 물을 채워 만든 스케이트장에 들렀습니다. 화서역 근처에 있었죠. 비닐하우스 옆 논에 물을 채워놓으면 그대로 얼어서 스케이트장이 되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여느 아이스링크장과 같이 입장료와 스케이트 대여료를 내야 했어요. 사장님은 스케이트장 옆 하우스에 난로를 피워놓고, 어묵과 커피를 파셨어요. 생각해보니 정말 대단한 수완이었습니다. 놀고 있는 논에 물을 채워서 입장료를 받는다니! 스케이트를 열심히 타다 보면 허기져서, 엄마한테 어묵을 사 달라 조릅니다. 난로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엄마는 이미 어묵 냄새에 출출해지던 참. 가족들이 오손도손 모여 어묵을 먹습니다. 한겨울에 1호선을 타고 화서역을 지나갈 때, 하우스가 보이면 그 어묵 생각이 납니다. 아직도 논밭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며 노는 아이들이 있을까 생각해봐요.

찾아가기도 멀고, 뛰어노는 아이들도 적은 괴산이지만, 제가 생각하는 시골의 겨울이 그렇습니다. 어느 정도 바쁜 일이 끝나가면, 겨울방학을 맞는 시골이에요. 책도 몰아 읽고, 뭔가 만들어보기도 하며, 잠시 서울에도 다녀올 틈이 생기는 시간이 아닌가 합니다. 방학은 휴가와 다릅니다. 성실한 학생은 학기보다 방학을 더 바쁘게 지내요. 성실한 농부도 마찬가지겠죠. 이리저리 하우스를 손보고, 계량기가 동파되지 않게 잘 싸매며, 버려진 나뭇가지들과 나무를 주워 모아 땔감으로 잘 정리해놓습니다. 어머니의 겨울이 그렇게 바쁘실 거란 것도 잘 알아요.

저는 농번기보다 농한기에 더 바쁜 농부이고자 합니다. 낮에는 밭을 일구고 밤에는 글을 쓰고 싶다 생각했지만서도, 귀농해야겠다는 결심에 가장 보탬이 된 건 ‘겨울'이었어요. 겨울이 되면, ‘이걸 해보자, 저걸 해보자' 하며 온 가족이 머리를 모아 하고 싶은 일을 궁리해보면 어떨까요. 일단 올겨울에는 괴산 집 뒷마당부터 정리할 요량입니다. 작은 하우스를 세워두려 해요. 누나와 날을 잡아 가기로 했습니다.

직장인인 아내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온전히 정신을 쏟을 시간을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매해 연차가 나오고, 주말에도 쉽니다. 가끔은 특별한 휴가를 받기도 해요. 그런데 아내를 보고 있자면, 이런 휴가는 말 그대로 일하느라 지친 사람들에게 다시 일할 만큼 기력을 보충할 기회를 주는 정도에 그치는 듯합니다. 시골의 겨울은 어떤가요. 어쩌면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봄 여름 가을에 정말 힘들었을 몸을 쉬어주는 기간으로 그칠지도 모를 일이죠. 그런데 사람이 겨울잠을 자는 것도 아닌데,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겨울입니다. 내년에 어떤 씨앗을 심을지 고민해야 할 때겠습니다.

벗 덕분에 쓴 기사입니다. 후원회원 ‘벗’ 되기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언론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주식 후원’으로 벗이 되어주세요!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