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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물에서 나와 물로 돌아가는 존재,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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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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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창세기 3장 19절의 이 말씀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20년 전 가신 아버지의 몸은 이제 다 썩어서 흙이요 먼지가 되었을 터이고 오늘도 세상은 서로 먹고 살겠다는 다툼으로 가득합니다.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너무도 당연해 보이는 말을 남겼지요. “있는 것은 있는 것이요,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아니 그럼, 있는 건 있는 거고 없는 건 없는 거지, 무슨 쓸데없는 뻔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곰곰 따져보면 사실 우리는 ‘없는 상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무언가 있는, 즉 유(有)가 있다면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인 무 (無)도 따로‘있다’고 말이죠. 우리 의식의 특성상 ‘무’라는 개념이 떠오르는 순간 ‘무’가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무는 유와 별도로 ‘있는’ 게 아니고, 무와 유는 동시에 서로 기댄 것이지요. 이걸 불가에서는 연기(緣起)라, 공(空)이라 하던가요.



파르메니데스는 ‘있음’과 ‘없음’이 서로 기댄 것을 모르고 이분법적으로 철저히 나누어, 있는 건 있는 거고 없는 건 없는 거니까 없는 데서 무엇이 생기거나 있던 것이 없어지는 변화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지요. 하지만 파르메니데스에서부터, 영원히 변하지 않는 독립된 실체라는 게 있다는 형이상학이 시작되고 그 뒤를 이어받은 플라톤은 이 세상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인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되지요.



내가 앉아있는 이 의자는 이데아 의자의 복제품이고 현실의 인간은 완전한 인간의 그림자로 최고선의 이데아를 향해 가는 존재라는 거죠.



인간이라는 종이 본래부터 완성품 상태로 존재한다는 이런 생각은 우주론과 진화론에 의해 완전히 무너졌지요. 137억년전 빅뱅이 일어나 ‘있음’인 우주가 출발했고 이 우주는 엄청 빠른 속도로 무한히 팽창하고 있습니다. 빅뱅으로 최초의 먼지인 수소가 생겨나고 헬륨, 탄소, 산소의 순으로 먼지들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이 먼지들이 중력 때문에 서로 뭉쳐서 별이 되고 그 별들이 소멸하면서 흩어져 나온 여러 원소들에서 약 40억년전 쯤 생명체 단세포가 출현했습니다. 그 이후 동식물로의 진화는 처음부터 인간이란 종이 완성된 형태로 세상에 난 것이 아니란 걸 보여줍니다.



기독교는 물론이고 불교나 여타 종교들이 이런 우주론이나 진화론을 아직 몰랐던 저 옛날에 시작되어서 이 세상의 모습에 대해 형이상학적 실체론에 기반한 설명을 하고 있지요. 인간은 본래부터 인간이라고 말이죠.



진화생물학자 닐 슈빈(Neil Shubin)의 <물에서 뭍으로의 위대한 여행>이란 논문이 있습니다. 약 3억7천만년 전 물고기가 뭍으로 올라오는 진화의 여정을 지질학과 고생물학이 밝혀가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지요. 물고기가 뭍으로 나오면서 중력을 버티기 위해 머리에서 목이 분리되고 팔, 다리와 관절이 생기고 호흡을 위해 폐와 갈비뼈가 생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학자들이 1920년대에 이 가설을 세우고 3억7천만년전 지질시대의 암석들을 뒤져오면서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린랜드, 캐나다, 중국, 라트비아등 세계 곳곳에서 어류와 양서류의 중간 생명체인‘테트라포드’(tetrapod)의 화석들을 발견하고 있다는 군요. 테트라포드는‘네 개의 발’이란 뜻으로 지느러미가 변한 겁니다. 양서류, 파충류, 조류,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가 다 이 테트라포드에서 갈라져 내려온 거랍니다



허, 그것 참! 3억7천만년전 물에서 땅으로 올라온 테트라포드가 나의 머나먼 할아버지라네요. 아니 더 올라가면 40억년전 지구상에 최초로 나타난 단세포 하나가 내 할미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빅뱅 때 출현한 최초의‘있음’(有)인 수소 먼지가 내 할비, 할미인거죠. “너는 먼지에서 났으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맞는 말씀입니다.



<물에서 뭍으로의 위대한 여행>이란 논문은 <종교는 왜 과학이 되려 하는가>라는 책에 들어 있는 글인데요. 저 옛날 여러 종교들이 이 세상 ‘있음’(有)의 현상들을 설명하는 과학 분야에 관여해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둥, 우주의 역사가 5천년이라는 둥, 마음이라는 형이상학적 실체가 세상을 지어냈다(一體唯心造)는 둥 여러 잘못된 주장을 했었지요.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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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과학자들이‘종교는 왜 과학이 되려 하는가’묻고 있지만 최고의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거꾸로 과학의 입장에서 종교적 물음을 던집니다. 그는 <위대한 설계>라는 책 1장 ‘존재의 수수께끼’에서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왜 무(無)가 아니라 무언가 있을까?” “왜 우리가 있을까?”“왜 다른 법칙이 아니라 이 특정한 법칙들이 있을까?”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해서 중세 시대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목적론적 자연 해명을 연상케 하는 물음입니다.



하지만 과학은 이 ‘있음’(有)의 세계를 전제 사실로 받아들이고, 이 ‘있음’의 세계, 인간을 포함하는 이 우주가 어떤 모습인지(how)를 설명해 보려는 시도입니다. 호킹이 묻는, 이 우주가“왜? 이런 모습으로 있는지(why) ”라는 물음은 이미 과학의 영역이 아닙니다. 호킹은 책 마지막까지 자신이 던진 세가지 “왜?”의 물음에 답하지 않습니다, 아니, 답할 수가 없겠지요. 그저“어떤 모습”의 우주인지에 대해서만 궁금해할 뿐입니다. 사실 종교도 이 “왜”에 대해서는 답할 수 없습니다. ‘있음’의 세계에 개체로 존재할 뿐인 사람이 ‘있음’과 ‘없음’을 넘어선 전체이신 당신께 “왜”를 물을 수도 없고 당신께서 답하셔도 우리 머리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습니다.



종교는 개체인 이 세상이 어떻게 생겨있는지, 왜 이리 생겨있는지, 개체인 나의 전생이나 내세가 있는지를 찾아보는 게 그 역할이 아닙니다.



종교란 개체에 불과한 내가 ‘있음’과 ‘없음’을 넘어선 전체이신 당신 앞에서 이 개체성을 완전히 접고 납작 엎드리는 행위입니다. 이렇게 ‘나’라는 개체성을 넘어서게 되면 그때 바로 전체이신 당신을 만나 뵈올 겝니다.



저 옛날 욥도 들이닥치는 여러 불행 앞에서 당신께“왜”하고 나를 주장하며 달려들지만 결국에는 철저히 머리 숙여 엎드립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유와 무를 넘어선 분이시고, 이 ‘있음’의 세계인 개체들을 내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욥처럼‘나’라는 이 개체 의식이 철저히 깨부수어지는 순간 마침내 우리는 귀로만 듣던 전체이신 당신을 눈으로 뵈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화엄(華嚴)에서 가르치는 대로 우리는 바다 위에 잠시 일렁이는 물결이요, 그 물결은 다시 바다로 돌아갈 겝니다.



글 김형태 변호사



*이 시리즈는 김형태 변호사가 발행하는 격월간 <공동선>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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