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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선거판 뒤흔드는 책사들… 아군인가, 독이 든 성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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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국힘 김종인 영입 파동과

정치 전략가들의 세계

‘노욕에 찬 정치 기술자!’

지난 4월 국민의힘 장제원 의원이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겨냥해 쓴 표현이다. 김 전 위원장은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를 승리로 이끌고서 물러났는데, 국민의힘 중진 의원들이 곧바로 당대표직을 놓고 갈등을 보이자 ‘아사리판’이라며 비판했다. 그러자 장 의원은 김 전 위원장을 향해 ‘희대의 거간꾼’ 같은 표현을 써가며 비난했다.

조선일보

일러스트=유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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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은 또다시 선거의 중심에 섰다. 국민의힘이 내년 대선을 위한 그의 영입을 두고, 한 달여 동안 내홍을 겪는 중이다. 그가 툭툭 던지는 말에 정치권이 들썩인다. 박빙의 선거에선 노련한 책사, 전략가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크게는 대선 판을 흔드는 거물급 정치인부터, 작게는 시·구의원 선거처럼 동네 구석구석의 민심을 꿰뚫어 후보에게 조언하는 사람이 그들. 2000년대 들어서는 출마자의 의뢰를 받고 전략을 짜고 수익을 내는 정치컨설턴트가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이강래·이광재도 전략가로 활약

대선 정국에 전략가라고 불리는 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건 1987년이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 네 후보가 맞붙었던 당시, 노태우 후보 진영이 처음으로 여론조사를 이용했다. 이 작업에 관여한 전병민(74) 한국정책연구원 고문은 본지 통화에서 “이전만 해도 경찰이나 안기부에서 작성하는 보고서 등으로 여론 동향을 파악했는데, 미국 갤럽에서 여론조사 기법을 들여온 사람이 있어 처음 적용했다. 수도권 주민들이 뭘 원하는지 등이 숫자로 데이터가 탁탁 나오니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과학 선거를 했고, 전략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1992년 대선에서도 김영삼 후보의 차남 현철씨가 주도했던 비선 조직 ‘동숭동팀’에서 활약했다. 전씨는 “과거에는 그리 많지 않은 신문과 방송 매체로 후보와 유권자 간 대화가 이뤄졌지만, 지금은 SNS도 있고, 유권자들의 정치의식이 높아져 전략가나 컨설턴트들이 활동하기에는 훨씬 더 어려운 것 같다”고 했다.

1997년 대선과 2002년 대선 때는 정당 내에 있는 정치인들이 주로 전략가로 활동했다. 1997년에는 40대 중반이던 이해찬·이강래·김한길 전 의원 등이, 2002년에는 노무현 후보의 최측근인 이광재 의원·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전략 수립에 공을 들이며 진보 진영이 연속으로 승리하는 데 한몫했다. 이광재 의원은 본지 통화에서 “당시 링컨, 케네디 등 대통령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고, 대학교수 등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들은 것을 바탕으로 후보와 상의해 당시에는 생소한 개념인 ‘디지털 경제’와 ‘정치 개혁’을 화두로 제시했던 것”이라며 “거창하게 전략이라는 건 특별하게 없다. 선거는 조직이나 기술이 아니라 많이 듣고, 가슴으로 나서야 승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전문 정치컨설턴트들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지역주의가 완화되고, 인터넷과 SNS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선거 메시지와 캠페인의 중요성이 커진 것이다. 선거 출마자가 의뢰하면, 판세를 읽고 그들이 채택할 수 있는 전략을 제시하는 게 주요 역할. 현직 정치컨설턴트 A씨는 “특정인에 대한 분노가 있거나 지나친 당파성이 있으면 선거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 어렵기 때문에 컨설턴트를 찾는다”고 말했다. 박성민 민컨설팅 대표는 “선거에서 이기려고 판세를 냉정하게 분석하고, 대중의 심리적 상태를 파악해 전략을 짜는 것이지, 공작을 하는 게 아니다. 정치인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전문적인 일이고, 종이 신문을 40년 동안 매일 읽으면서 공부를 해왔다”고 말했다.

어려움도 있다. 한 정치인이 컨설턴트에게 전략을 짜달라고 요청하면, 해당 정치인의 측근들이 경계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만약 컨설턴트의 전략을 따라 선거에서 승리할 경우, 자신들 자리가 위태롭거나 얻어갈 수 있는 몫이 줄어들 우려를 한다는 것이다. 정치컨설턴트 A씨는 “일단 판이 차려지면 캠프에 원래 몸담고 있었던 사람에게 ‘나는 이 선거만 끝나면 아무 미련 없이 떠날 것이니 절대 나를 경계하지 마라’고 신신당부하는 게 제일 먼저 하는 일”이라고 했다.

◇ 81세 김종인이 각광받는 이유

선거 전략가로 지금 가장 핫한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은 1940년생, 올해 81세다. 2002년 대선에서 안희정·이광재씨가 30대 중반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무려 50살 가까이 많은 고령이다. 비결은 무엇일까. 이광재 의원은 “민주당에 와서는 성장 전략을 얘기하고, 보수 진영에 가서는 경제민주화를 얘기했다. 그래서 그 중간에 있는 에너지를 가져갔다”며 “그분이 독일에서 오래 공부했는데, 독일은 진보와 보수가 연정하는 게 일상화돼 있으니, 영향을 끼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일부 정치컨설턴트는 김 전 위원장이 가졌던 ‘전권(全權)’이 힘이라고 말한다. 박성민 대표는 “정치컨설턴트는 정치인이 고를 수 있는 전략을 제시하는 데 반해, 전략가는 전권을 쥐고 자신이 머릿속에 그리는 전략을 채택해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김 전 위원장은 보수·진보 정당에서 전략가로 활동하면서 마음대로 결정해 펼칠 수 있었다. 삼국지에서 유비의 책사로 활약한 제갈량이 전권을 갖고 활약해 성공할 수 있었던 것과 비슷한 이치”라고 말했다. 또 다른 전직 컨설턴트도 “선거를 앞두고 상담하러 오는 사람을 보면, 조직이나 사람들은 그대로 둔 채 본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특정 부분만 조언해달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선거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며 “김 위원장의 힘도 과거 새누리당·민주당·국민의힘을 오가며 자신이 구상한 대로 마음껏 할 수 있었던 게 원천”이라고 했다. 다만 70대 전직 컨설턴트 B씨는 ‘언론의 힘’을 이유로 꼽았다. 그는 “김종인씨가 말하는 것을 언론에서 정말 크게 써 준다. 그렇게 크게 보도가 되면 전략이 돼 버리는데, (김 전 위원장이) 언론을 다루는 솜씨가 대단하다. 그게 힘”이라고 말했다.

김 전 위원장의 거취는 불투명하지만, 현재 국민의힘에는 김병준 상임선대위원장, 김한길 새시대준비위원장 등 60대 후반의 전략가들이 합류했다. 민주당에서도 지지율이 떨어지자 60대 후반인 이해찬 전 대표 등판설이 나왔다. 일각에서는 노추(老醜)·노욕(老慾)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한 전직 청와대 비서관 출신 인사는 “그분들은 젊은 나이에 역동적인 시대를 살았고,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겪다 보니 사회적 경험의 폭이 넓은 데 반해, 지금 젊은 세대는 상대적으로 경험이 적다. 젊은 사람이 김 전 위원장보다 능력이 낫다면 당연히 쓰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곽창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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