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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이재용도 와서 봤다” 國博 관장이 최초로 밝힌 ‘이건희 기증’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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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허윤희 기자의 발굴]

반가사유상으로 ‘한국의 루브르’ 꿈꾸는

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 관장

광활한 우주를 품은 방에 반가사유상 두 점이 앉았다. 소극장 무대 위 주인공처럼 좌대에 오른 그들은, 오른발을 왼쪽 무릎 위에 걸치고[반가·半跏] 오른손 끝을 뺨에 댄 채 깊은 생각[사유·思惟]에 잠겨 있다. 검붉은 흙벽과 바닥은 미세하게 기울었고, 천장에 달린 2만개의 봉이 밤하늘 별처럼 반짝인다.

지난달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설치된 ‘사유의 방’에 관람객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국보 금동반가사유상 두 점만을 위한 439㎡ 규모의 공간.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라는 부제가 입구에 붙었다. 어둡고 긴 진입로를 걷는 동안 잡념은 사라지고, 모퉁이를 도는 순간 마주치는 초현실적 공간에 탄성이 터진다. 관람객들은 말 없이 반가사유상을 바라보다가, 탑돌이 하듯 불상을 돌며 명상에 빠진다. 소셜미디어에선 “잠시 천상계에서 반가상 두 분을 뵙고 온 기분” “힘든 하루, 고된 노동의 피로가 씻겨내린다”는 호평이 쏟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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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이 검붉은 흙벽으로 둘러싸인 ‘사유의 방’에 앉았다. 나란히 놓인 두 반가사유상 위로 2만개의 봉이 밤하늘 별처럼 반짝인다. 민 관장은 “현대사회가 빠른 속도로 변하는데, 변하지 않고 멈춰 있는 이 공간에서 관람객들이 마음의 평온을 얻어가시면 좋겠다”고 했다. /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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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천상의 공간을 기획하고 만든 주인공, 민병찬(55)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만났다. 그는 관장에 임명된 지 3개월 만에 열린 신년 간담회에서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을 찾아가듯 두 반가사유상을 우리 박물관의 대표 브랜드로 키우겠다”고 발표했고, 9개월 만에 이를 구현해냈다. 특정 소장품만을 위해 상설 전시 공간을 만든 것은 중앙박물관 역사상 처음이다.

◇빛과 향, 바닥 경사까지 계산했다

-개관하자마자 반응이 뜨겁다.

“일체의 텍스트 없이 오롯이 두 점을 감상하고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요즘 관람객들은 유물을 직접 설명해주는 것보다 자신만의 경험을 중시한다. 반가사유상을 온전히 마주할 수 있도록 유리 진열장도 놓지 않았다. 두 점의 에너지와 공간, 예컨대 벽의 질감과 색깔, 천장, 조명까지 일체화돼 관람객들이 하나의 작품처럼 느끼고 좋아하는 것 같다.”

-어떻게 이런 아이디어를 냈나.

“원래 반가사유상 두 점을 1년마다 교체 전시해 한 점은 늘 수장고에 있었다. 두 작품이 함께 전시된 것은 딱 세 번뿐이다. 그런데 2015년 ‘고대불교조각대전’ 특별전 때 두 점을 함께 전시했더니 반응이 뜨거웠다. 관람객들이 우리나라 불교 조각의 최고 걸작인 두 작품을 비교 감상하며 자부심을 느끼는 걸 보면서 언젠가는 두 점을 상설 공간에 함께 전시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민 관장은 국내 손꼽히는 불교미술사학자이자 32년 동안 국립박물관에서 근무한 ‘박물관맨’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과장, 연구기획부장, 학예연구실장, 국립경주박물관장을 거쳐 지난해 11월 중앙박물관장에 발탁됐다. ‘고려불화대전’ ‘고대불교조각대전’ 등 굵직한 특별전을 기획해 호평받았고, 일본 오사카대학과 공동으로 진행한 한·일 금동 반가사유상 조사 연구를 총괄했다. 그는 “1990년 말단 학예사로 ‘삼국 시대 불교 조각전’을 준비하면서 국보 78호, 83호 반가사유상 두 점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고, 그때부터 반가상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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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공간에 나란히 앉은 두 국보 반가사유상. 건축가 최욱이 설계한 '사유의 방' 전경이다. /원오원아키텍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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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사유상의 매력이 뭘까.

“예술적으로 완벽하다. 반가를 하고 손가락을 뺨에 댄 자세가 독특한 데다 정면·측면·뒷면 어디서 봐도 곡선이 유려하게 흐른다. 신비롭고 오묘한 미소는 바라만 봐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사유’라는 행위가 주는 철학적 메시지도 강렬하다. 19세기 프랑스 조각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연상케 하지만, 반가사유상의 기원은 그보다 최소 1500년 이상 앞선다. 불교가 태동한 인도에서 처음 만들어졌고 중국에서 성행한 후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까지 전파됐다.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만들어졌지만, 예술적 완성도와 기교가 한국에서 최정점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전 세계 남아 있는 70여 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 이 금동 반가사유상 두 점과 일본 교토 고류지에 있는 목조 반가사유상이다. 고류지 상은 83호 반가상과 쌍둥이처럼 닮았고 신라에서 넘어간 것이니 ‘세계 빅3′ 반가상이 모두 한국에서 제작된 것이다.”

-해외에서도 인기가 높다던데.

“10년 전 전시과장으로 외국 박물관을 접촉할 때마다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대여를 요청하는 유물이 반가사유상이었다. 반가사유상의 출품 가능 여부가 전시 규모를 결정지을 정도로 해외 큐레이터들이 최고로 꼽는다.”

‘사유의 방’ 내부 설계는 건축가 최욱이 맡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이 건축가와 협업해 전시 공간을 만든 첫 사례다. 진입로부터 시작해 도입부와 출구까지 극한의 디테일을 살렸다. 최욱은 “관객이 무대에 선 배우를 속눈썹 떨림까지 맨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가 소극장 규모인 24m인 것을 고려해 공간을 디자인했다”며 “고개를 들지 않고 올려다볼 수 있는 가장 편안한 높이를 설정했다”고 했다. 방 전체를 감싼 적벽(赤壁)은 전남 해남 땅속 50m 깊이에서 퍼온 흙에 삼베를 섞고 편백과 계피향을 더했다. 반가상이 앉은 둥근 좌대는 옻칠 장인이 17번 칠했고, 조명이 떨어지는 자리에 그림자가 생기지 않도록 빛을 흡수하는 숯을 썼다. 흙·숯·옻이라는 자연 재료에 향과 빛, 바닥 경사까지 치밀하게 계산해 박물관 대표 유물을 예우하는 최고의 공간 예술로 승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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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방'에 나란히 앉은 두 국보 금동반가사유상. /원오원아키텍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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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방'에 나란히 앉은 두 국보 금동반가사유상. 왼쪽은 국보 78호, 오른쪽은 83호다.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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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순간, 발가락으로 표현한 명품!

두 반가사유상은 비슷해 보이지만 표정과 옷차림, 무게, 제작 시기가 모두 다르다. 78호는 6세기 후반에 제작됐고 날카로운 콧대와 또렷한 눈매가 특징이다. 머리엔 화려한 보관(寶冠)을 썼고, 양옆으로 휘날리는 어깨 위 날개옷은 생동감을 준다. 83호는 이보다 늦은 7세기 전반에 제작됐고 단순하고 절제된 양식이 돋보인다. 78호의 3배에 이를 정도로 무겁다. 머리엔 세 개의 반원을 이어 붙인 삼산관(三山冠)을 썼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반신, 두 줄의 목걸이가 간결한 느낌을 준다. 반면 무릎 아래의 옷주름은 물결치듯 율동감 있고, 힘주어 구부린 발가락엔 긴장감이 넘쳐 흐른다.

-두 점을 비교하며 감상하니 차이가 확실히 보인다.

“대단한 건 1500년 전에 금동으로 이걸 주조하면서 어떤 재질보다 부드럽게 표현했다는 거다. 목조는 나무를 깎으면 되지만, 금동은 밀랍으로 원형을 만들고 거푸집(틀)을 제작해 밀랍을 제거한 후 쇳물을 붓는 공정을 거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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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방'에 앉아있는 두 국보 반가사유상의 뒷모습. 관람객들은 탑돌이 하듯 타원형 받침대 주위를 천천히 돌며 명상에 빠진다.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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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두 불상은 무슨 생각을 저리 골똘히 하는 걸까.

“글쎄, 보관을 쓰고 허리에 요패를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귀한 신분임에 틀림없다. 반가사유상 모델을 석가모니가 되기 이전의 싯다르타 태자가 생로병사를 고민하는 모습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저는 미륵보살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싯다르타가 인간적 고뇌에 초점을 맞췄다면, 미륵보살의 사유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더 종교적인 차원의 고뇌다. 나중에 부처가 돼 지상으로 내려왔을 때 중생을 구제할 방법을 고민하다 마침내 그 해법을 찾았기에 조용히 미소짓는 게 아닐까. 83호를 보면, 왼쪽 무릎 위에 걸친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힘이 딱 들어가 있다. ‘아!’ 하는 깨달음의 순간을 얼굴의 미소뿐 아니라 발가락에까지 표현한 게 재미있지 않은가.(웃음)”

-그래서 영혼이 치유되는 느낌을 받는 걸까.

“시공을 초월해 ‘사유’는 인류사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였다. 인간의 내면 세계를 들여다보고 성찰해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가게 해준다. 제가 이 방을 만들면서 반가사유상을 세계적인 작품으로 거듭나게 하고픈 바람도 컸지만, 다른 소망도 있었다. 현대사회가 빠른 속도로 변하는데, 변하지 않고 멈춰있는 이 공간에서 마음의 평온을 얻어가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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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찬 관장은 본지에 처음으로 이건희 컬렉션 수장고를 공개했다. 민속품과 소반, 불상들이 놓인 수장고 2층에서 그가 장갑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작은 목기(木器)를 들어 보였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인디애나 존스를 꿈꾸던 소년

민 관장은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청주 운호고를 졸업했다.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를 택한 건 순전히 영화 때문이다. “1982년 개봉한 ‘인디애나 존스 1편’을 보고 고고학자라는 직업에 홀딱 반했다. 신입생 환영회 때 선배한테 ‘우리는 해외 발굴 언제 가나요’ 물었다가 ‘해외 발굴 같은 소리 한다’고 구박을 받았다. 1학년 여름방학 때 몽촌토성 발굴을 했는데 완전히 노가다더라. 이건 아닌데 싶었다.(웃음)”

-환상이 바로 깨진 건가.

“군대 갔다와서 다른 전공을 찾아야겠다 생각하던 중 강우방 선생의 동양불교조각사 수업을 들었다. 다른 교수들은 슬라이드를 보여주면서 외우라고 하는데, 이분은 외우지 말고 느끼라고 했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었다. 그해 경주 답사를 갔는데 당시만 해도 석굴암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문이 열리고 딱 들어가는 순간, 본존불에 압도당했다. 아, 돌 조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나도 불교 조각을 해야겠다 결심했다.”

-학부를 졸업하자마자 박물관에 들어왔다.

“대학원에 합격했는데 안휘준 교수님한테 전화가 왔다. 고용원 한 사람이 필요한데 박물관 갈 생각 없느냐고. 솔직히 가기 싫었다. 공무원보다는 학교에 남아서 계속 연구하고 싶었다. 우리 아들 학예사 됐다고 어머니는 엄청 좋아하셨는데, ‘학예사 1호봉’ 월급 받고 영수증을 보여드렸더니 한참을 우셨다. 명색이 서울대까지 나와서 월급이 이게 뭐냐고. 당시 30만원인가 했는데 이것저것 떼고 나니 15만원 남더라.”

-관장으로서 지난 13개월은 어땠나.

“코로나로 휴관과 재개관을 반복하는 상황이라 긴장과 책임감이 컸다. 외국에서 빌려오려다 무산된 작품들도 있고,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 특별전은 인기가 많았는데 인원을 제한해야 했다. 가장 마음 아팠던 건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이다. 엄격한 인원 제한 때문에 많은 분이 끝내 전시를 못 봤다. 박물관은 언제든지 와서 전시를 볼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하는데, 관람객이 못 들어오게 막아야 하는 상황이 너무 힘들고 죄송했다. 기증 1주년인 내년 4월 중앙박물관에서 ‘이건희 컬렉션’을 기증받은 13개 기관의 연합 특별전이 크게 열리니 기대해달라.”

-이건희 컬렉션 기증은 올해 문화계를 달군 가장 큰 이슈였다. 고미술품 2만1693점을 중앙박물관에 기증했는데, 기증품 선정 과정에 직접 관여하셨나.

“삼성 측에서 지난 1월 처음 기증 의사를 밝혀왔다. 엄청난 숫자, 대단한 작품들이 리스트에 쫙 적혀 있더라. 그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했지만, 누구나 아는 명작, 예를 들어 ‘인왕제색도’ 같은 대표작이 있으면 기증자의 뜻이 더 빛날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인왕제색도’는 이건희·홍라희 부부가 미술품 수집을 시작하며 처음 구입한 ‘1호 컬렉션’이었다. 자식 같은 1호까지 아낌없이 내놓으신 거다. 홍라희 여사가 나중에 박물관에 와서 ‘인왕제색도 기증은 우리 부회장(이재용) 뜻’이라고 하더라. ‘우리 부회장이 기증하려면 제대로 된 거 해야지, 숫자만 많으면 안 된다고 했다’고.”

-이재용 부회장이 서울구치소 수감 중에 뜻을 밝힌 건가.

“아마 이 부회장이 급성 충수염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상의한 것 같다.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이 개막했을 때, 홍라희 여사와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이 1차로 전시를 관람했고, 이재용 부회장 출소 후 가족들이 다 같이 한 번 더 왔다. 이 부회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에 손자들까지 와서 관람했다. 홍 여사 입장에선 부부가 애정을 쏟아 수집한 작품들을 2세, 3세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까.”

-컬렉션에 얽힌 추억담도 많이 나왔겠다.

“도자기·전적류는 이건희 회장이, 회화·목가구·민속품은 거의 홍 여사가 수집한 것 같다. 조선 시대 목가구를 둘러보면서 홍 여사가 ‘아휴, 내가 이거 구하느라고 인사동을 얼마나 돌아다녔는데…’라고 하더라. 이서현 이사장은 아버지를 생각하면 어린 시절 서재에 앉아 도자기 들여다보던 모습이 제일 먼저 생각난다고 했다. 이건희 회장이 생전에 ‘대한민국에서 도자기는 내가 제일 잘 봐. 다른 사람들은 감정만 해주면 되지만, 나는 내 돈 들여 사잖아’ 했다더라. 기증품 목록만 봐도 도자기가 많다. 이서현 이사장이 ‘이번에 리움 전시를 하려고 보니 수장고에 도자기가 없더라’며 ‘나중에 저희가 요청하면 꼭 빌려주셔야 해요’라고 농담했을 정도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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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찬 관장은 본지에 처음으로 이건희 컬렉션 수장고를 공개했다. 민속품과 소반, 불상들이 놓인 수장고 2층에서 그가 장갑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작은 목기(木器)를 들어 보였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민 관장은 이날 본지에 처음으로 이건희 컬렉션 수장고를 공개했다. 2만1693점이라는 대규모 기증은 국립박물관 개관 이래 처음. 박물관 하나를 통째로 옮기는 규모의 ‘초특급 유물 이송 작전’을 거쳤다. 박물관 수장고 21개 중 하나를 ‘이건희 수장고’(면적 약 1000㎡)로 마련했다. 그는 곱게 포장된 유물들을 가리키면서 “포장부터 역시 삼성이더라. 삼성 측이 애초부터 컬렉션을 신중하게 구분해서 포장 관리해왔다. A급 도자기는 최고급 한지로 감싸 나전칠기 박스에 넣고, 그보다 덜한 건 일반 한지, 오동나무 박스에 담는 식”이라고 소개했다.

-이건희 기증관은 서울 송현동에 짓는 것으로 결론 났다. 애초 유족들이 기관의 성격에 맞게 작품을 배분해 기증했는데 다시 한 곳으로 통합하는 것이 기증의 뜻에 맞는 건가.

“‘국가 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위원회’에서 수차례 논의한 결과다. 대부분 위원들이 새로 건립되는 기증관에 작품을 모두 넘기고 통합 관리를 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의견을 냈다. 중앙박물관은 2025년까지 이건희 기증품에 대한 기초 연구를 끝내고, 새 기증관이 건립되면 일괄 넘기기로 했다. 이건희 기증관은 만들고 끝나는 게 아니라 건립하고 나서가 진짜 시작이다. 현대미술과 고미술을 어떻게 한 곳에서 통합·운영할지 계속 논의하고 연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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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찬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반가사유상 두 점이 놓인 '사유의 방'에 앉았다. 민 관장은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을 찾아가듯 두 반가사유상을 우리 박물관의 대표 브랜드로 키우겠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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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혜원 나전칠기’ 반대했다 쫓겨난 소신맨

박물관 안팎에서 민 관장은 ‘소신맨’으로 통한다. 손혜원 전 의원의 ‘목포근대역사문화공간 투기 논란’ 때 그의 소신이 주목받았다. 2018년 학예연구실장 재임 중 손 의원이 중앙박물관에 나전칠기 현대 미술품 구입을 종용하자 강하게 반발했다가 경주박물관장으로 전격 교체됐다. 당시 복수의 문화체육관광부·국립박물관 관계자들은 “배기동 관장이 ‘나전칠기를 비롯한 현대 공예 미술품을 구입하라’는 주문을 수차례 했지만, 민 실장은 ‘국립중앙박물관은 본래 고고학·역사학·미술사 연구와 전시를 표방하는 기관인 만큼 현대 미술품 구입을 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고, 대한민국역사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과 유물 수집 범위가 겹치기 때문에 구입해선 안 된다’고 반대했다”며 “손 의원 강요에 굴하지 않은 학예실장이 사실상 경주로 쫓겨난 것”이라고 전했다.

-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정확히 말씀드리면 저는 손혜원 의원을 직접 만난 적이 없다. 통화한 적도 없다. 딱 한번 보좌관 전화를 받았는데, 담당 부장과 얘기하시라 하고 끊은 적은 있다. 다만 부장들을 통해서 상황을 계속 들었다. 국립민속박물관의 학예사를 받으라고 강요하고, 현대 작품을 구입해야 한다고 계속 요구해 후배들 마음 고생이 심했다. 그래서 고민할 것 없다고 얘기했고, 관장께도 국회의원이 강요한다고 휘둘릴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 드렸다. 얼마 뒤 관장께서 불러서 ‘경주 관장으로 가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쫓겨나신 거네(웃음).

“그런가? 경주관장은 불교 조각 전공자로선 꼭 한번 가고 싶은 영광스러운 자리다. 감사한 마음으로 내려갔다.”

그는 박물관 내 대표적인 ‘일본통’으로도 꼽힌다. 특히 2010년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고려불화를 한자리에 모은 ‘고려불화대전’은 고려불화의 가치를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당시 전시팀장이었던 그는 일본 내 사찰과 박물관을 찾아다니며 소장자를 끈질기게 설득해 대여 승낙을 받아냈다.

-박물관 역사에 남을 대형 특별전으로 주목을 받았다.

“2008년 연수 끝나고 일본 선생들이 마련해준 환송회에서 ‘한국 돌아가면 고려불화 전시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저명한 불교회화사 학자인 가지타니 선생이 박수를 쳐줬다. 막상 전시를 준비하면서 보니 사찰을 찾아가 설득하는 과정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50~60곳을 일일이 찾아서 섭외하고, 전시 후에 다시 찾아가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도쿄국립박물관이 보증을 서줘서 가능한 일이었다. 감동적이었던 건 어느 사찰 스님의 말이다. 그림도 고향에 한번은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겠냐며, 흔쾌히 빌려줬다. 그래서 전시 제목을 ‘700년 만의 해후’라 잡았다.”

-지금은 한일 관계가 악화돼 교류가 많이 끊겼다.

“쓰시마 불상 문제도 있고 정치적으로도 악화돼 안타깝지만 언젠가는 다시 좋아질 거라고 믿는다. 그때 못 왔던 고려불화 절반도 언젠가 꼭 한국에서 전시하고 싶다. 쌍둥이 불상인 고류지 목조 반가사유상과 우리 83호 반가사유상이 한자리에서 만나는 날도 꿈꾼다. 언젠가는 성사되지 않을까.”

[허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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