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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모유 수유하면서도, 설거지하면서도 인강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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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아기 업고 공무원 시험 준비

’맘시생’이 늘어나는 까닭은?

조선일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맘시생' 심혜인씨는 "오후 2시쯤 되면 아이들이 엄마를 찾는 전화가 계속 울려서 도서관에 못 가고 카페에서 공부한다"고 했다. /심혜인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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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셋을 키우는 심혜인(30)씨는 2년 전부터 군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둘째를 임신하고 건강이 나빠져 회사를 그만뒀지만, 그 후로 육아와 병행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어려웠다. 요즘 심씨는 새벽 5시에 일어나 2시간 동안 시험 공부를 하고 아이 셋을 학교와 어린이집에 보낸다. 부족한 공부 시간을 따라잡기 위해 설거지와 빨래할 때도 인터넷 강의를 반복해 듣고, 아이를 재울 때도 옆에 조그만 스탠드를 켜놓고 문제를 푼다.

심씨는 “임신하거나 어린아이 키우는 직원을 좋지 않게 보는 회사도 많아서 사기업에 재취업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면서 “공무원은 육아기에 조금 일찍 퇴근하는 제도를 이용할 수 있어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제는 아이들도 ‘엄마, 내 옆에서 공부해’ 하면서 자리를 만들어주기도 하고, 공부 안 하는 날엔 먼저 ‘엄마, 왜 오늘은 안 해?’ 묻더라고요.”

심씨처럼 아이를 키우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맘시생(엄마+공시생)’이 늘고 있다. 인스타그램에서 ‘맘시생’을 검색하면 1만2000개 이상의 게시물이 뜬다. 공부 계획표를 공유하거나 하루에 공부한 시간을 꼬박꼬박 기록한 게시물들이다. 공무원 준비생을 위한 커뮤니티에는 ‘맘시생’끼리 카메라를 켜놓고 함께 공부하는 ‘캠스터디’ 모집 글이나 아이 키우며 시험에 합격한 후기도 수시로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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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공부하는 책상에서 놀고 있는 아이. /심혜인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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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육아와 공부를 병행해야 하는 ‘맘시생’은 자투리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아이 셋을 키우며 교육행정직을 준비하는 박모(39)씨는 “셋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모유 수유 하면서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있다”면서 “엄마들끼리 대화방을 만들어서 문제도 내주고, 필요한 자료를 공유하면서 서로 공부를 돕는다”고 했다. “직장 그만두고 육아만 하다 보니 저 자신이 점점 사라진다는 생각에 스트레스가 심했거든요. 공부를 시작하고 점수가 조금씩 오르니 성취감 때문인지 육아 스트레스가 많이 줄었어요. 아이들이 물도 떠다 주면서 ‘엄마 꼭 합격할 거예요!’ 응원해주고요.”

박씨는 “이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임신했다는 이유로 눈치를 봐야 했고, 육아휴직 1년도 보장받지 못했다”고 했다. 박씨처럼 사기업에서 임신·출산 등으로 차별을 경험하고 공무원 시험으로 눈을 돌리는 경우도 많다. ‘맘시생’이 늘어나는 현상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전기택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고학력 주부가 취업할 수 있는 민간 부문 일자리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연령 제한이 없는 공직에 취업하려는 여성 수요가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민간 기업의 입장에선 일·가정 양립이 가능한 근로 환경을 조성하지 못해 양질의 여성 인력을 공공 부문에 뺏기는 상황”이라고 했다.

육아를 병행하려는 ‘맘시생’들 사이에선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출퇴근할 수 있는 지방직 9급 공무원 선호가 높다. 실제로 지난해 전국 지방자치단체에서 일하는 여성 공무원 비율은 처음으로 40%를 넘었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지방직 여성 공무원 비율은 46.6%로 2019년 39.3%, 2018년 37.8%에 비해 크게 늘었다. 7급·9급 공채에서 여성 합격자 비율이 52.1%, 57.1%로 늘어난 반면, 퇴직 공무원은 남성이 많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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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단절여성을 위한 일자리 재창출 캠페인에 참가한 여성이 채용게시판을 살펴보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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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인한 고용 환경 변화도 ‘맘시생’ 증가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한국개발연구원(KDI)에 따르면, 코로나 1차 유행기인 지난해 3월 25~54세 여성 취업자 수는 전년 대비 54만1000명 감소했고, 이는 남성 취업자 수 감소 폭(32만 7000명)의 1.7배였다. 특히 초등생 자녀를 두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39~44세 기혼 여성의 노동 공급이 가장 많이 감소했다. KDI는 “코로나 위기 중 학교 폐쇄로 인한 자녀 돌봄 부담이 증가하면서 기혼 여성의 노동 공급이 제한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교육행정직 공무원을 준비 중인 가경아(34)씨는 “코로나로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시간이 늘어나 책을 볼 시간조차 없다가 올해 9월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면서 “나이 제한 때문에 이력서도 못 넣는 회사가 많은데, 공무원은 나이 제한이 없고 저 같은 경력 단절 여성에게도 공평한 기회를 준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고 했다. “이제 ‘누구의 엄마’로만 살아야 하나 회의감이 밀려왔는데, 더 나이 들기 전에 도전해보고 싶어서 용기를 냈어요. 살면서 이렇게 열정적으로 공부해본 적이 없었는데 꼭 합격해서 아들에게 멋진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백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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