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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사람과 법 이야기] 가까운 주먹과 먼 법의 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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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김씨는 어스름한 저녁 무렵 동네 편의점에 들르려고 골목길을 나섰다. 순간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빠른 속력으로 들이닥치는 택배 트럭이 있었다. 놀라서 피하려다 길바닥에 자빠지면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들뻘 나이로 보이는 트럭 운전사 청년은 대뜸 차창을 열고 욕설을 내뱉는다. '○깔 똑바로 뜨고 다녀!'

사과를 받는 것은 언감생심, 욕까지 얻어먹은 김씨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언성 높여 같이 욕을 해주니, 이번에는 차에서 내린 청년으로부터 멱살잡이를 당하던 끝에 뺨까지 두 대 얻어맞았다. 완력이 있고 주먹질이라면 일가견이 있었던 김씨. 같이 멱살을 잡고 실랑이를 벌이다 빈틈을 노려 정의의 일격을 정타로 날렸다. 무도한 운전사는 코피를 터뜨린 채 바닥에 웅크리며 주저앉았다. 그날 저녁 시비는 그렇게 일단락된 듯했다.

하지만 누가 신고를 했는지 경찰차가 바로 현장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이 싸움으로 인해 쌍방 폭력 사건으로 입건됐다. 상해 진단 결과 청년은 얻어맞은 코뼈에 금이 간 것으로 확인됐다. 청년은 생계를 위해 어렵게 배송 차량을 운전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한 김씨지만 그래도 아들뻘 청년의 딱한 처지에 마음이 쓰였다. 그리하여 치료비 200만원은 김씨가 기꺼이 부담해줬다.

김씨는 이것으로 다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일은 이제 시작이었다. 반년쯤 지날 무렵 법원에서 날아온 우편물은 김씨에게 물경 수백만 원에 달하는 벌금을 내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관계법에 따르면 청년은 김씨의 용서로 폭행죄로 처벌받지 않지만, 중한 상해를 가한 김씨는 합의 여부와 상관없이 유죄란다. 이 약식명령에 도저히 승복할 수 없었던 김씨는 절차에 따라 정식 재판을 청구하고 법정에 나섰다.

"저는 교통사고를 당하고서 뺨까지 맞은 피해자인데요. 가해자 처벌은 않으면서 피해자만 이 자리에 서는 것이 부당합니다. 먼저 싸움을 걸어온 상대방을 막으려다 벌어진 일이에요. 이건 정당방위로 무죄 아닌가요? 치료비도 부담했는데 또 벌금을 내라니, 너무 억울합니다." 재판을 담당한 판사는 가슴이 답답했다. 억울해하는 김씨 심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니지만, 판사가 해줄 수 있는 재량의 폭이 너무나 옹색했기 때문이다.

정식 재판 법정에는 싸움을 벌인 쌍방 폭력 사건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으로 차고 넘친다. 자신이 유일한 피해자인데 경찰은 상대방 거짓말만 듣고 기계적으로 쌍방 폭력으로 사건을 변질시켰다. 상대방은 아무런 상처도 없는데 상해 진단이 나왔다. 허위 진단서를 끊은 의사를 증인으로 불러달라, 가해자가 먼저 도발을 해왔기에 이를 막으려다 벌어진 일이다, 나는 정당방위 무죄다.

특히 정당방위에 관한 법적 쟁점에는 매우 난해한 법리가 동원되는 터, 법 전문가조차도 복잡다단한 이론을 현장에 적용하는 데 애를 먹기 일쑤다. 정당방위인지를 잘 가리려면 공격 행위와 방위 행위의 실상이 잘 드러나야 한다. 하지만 겉으로 나타난 행동이나 당사자들의 심산을 나중에 법정에서 재현할 때 서로 말이 달라지다 보면 실상을 아는 데 많은 애로가 있다. 격정과 흥분 와중에 벌어지는 공격과 방어의 폭력 현장에 휘말린 당사자들조차도 진상에 대한 기억과 설명이 충분하지 못할 때가 많다.

특히 쌍방이 서로 공격과 방어를 주고받는 이른바 '싸움' 국면을 놓고 정당방위를 다룰 때는 문제가 꽤 심각해진다. 이 대목에서 판사의 시각과 일반 시민의 시각이 다소 다른 듯하다.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 의견과 판사 의견이 종종 갈리는 대목이기도 하다. 대체로 싸움에 대해서는 정당방위가 잘 인정되지 않는 것이 법정 현실이다. 싸움판에 대해 판사들이 정당방위 무죄를 내리는 데 주저하는 이유가 나름대로 있기는 하다. 아무리 법이 멀더라도 주먹 편을 들기엔 직업적 책임감이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리라.

김씨 사건을 법적·기능적으로만 보고 유죄로 처리하자니 무심한 처사로 주저되는 면이 있기는 하다. 여기에 상식이 가르쳐주는 지혜를 더하는 고심이 필요한 듯하다. 이번 주말 필자는 정당방위의 법적 문제를 다루는 한 토론회에 참석하는데, 좋은 생각거리를 얻으리라 기대한다. 그래서 인생과 법의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는 꼬리를 물고 한도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나 보다.

매일경제

[김상준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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