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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시네마 클래식] 영화의 아프가니스탄 소녀는 왜 남장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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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천상의 소녀’

뉴스레터 ‘시네마 클래식’은 영화와 음악계의 이모저모를 들려드리는 ‘이야기 사랑방’입니다. 전·현직 담당 기자들이 돌아가면서 취재 뒷이야기와 걸작 리스트 등을 전해드립니다. 오늘은 황지윤 국제부 기자가 과거 탈레반 치하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운명을 다룬 영화 ‘천상의 소녀’를 소개해드립니다. 황 기자는 2019년 문화부에서 1년간 영화를 담당하며 ‘혼자 보긴 아까워’ 코너를 연재했습니다. 혼자만 간직하기에는 어쩐지 아쉬운 영화들을 틈날 때마다 소개해드릴 예정입니다.

조선일보

세디그 바르막 감독의 영화 '천상의 소녀(2003)' /영화랑


최근 조선일보 국제부원들은 격랑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이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의 손에 넘어가게 된 지 거의 한 달이 다 돼 갑니다.

지난달 15일 아프간 정부는 수도 카불에 진입한 탈레반에 ‘백기’를 들고 정권을 이양했습니다. 가장 먼저 감지된 변화는 거리에서 여성이 자취를 감춘 것입니다. 생존을 위한 ‘조건 반사’ 반응이었겠지요. 특히 1996~2001년 탈레반 집권을 기억하는 이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탈레반 치하의 거리는 여성들에게 결코 안전한 공간이 아니니까요.

“탈레반 무장대원이 탄 차량을 목격한 한 여성이 울부짖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를 잡으려 하고 있었다” 탈레반이 카불 시내로 들어오던 날을 전한 영국 가디언의 르포 기사 한 구절이 꽤 오래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그 순간, 울부짖던 여성이 느꼈을 찰나의 공포를 상상하면 아득해집니다. 추체험으로는 도무지 가늠하기 어려운 절망과 공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역시나, “바뀌었다”고 자부하던 탈레반은 국제 사회의 우려대로 여성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폭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여성인권 존중한다던 탈레반, 부르카 안 입었다고 거리서 총살]

[극단주의 탈레반 본색 드러냈다… 임신 8개월 여경 가족 앞에서 총살]

미군의 카불 공항 철수 작전이 지난달 31일을 기점으로 막을 내리자 아프간 이슈에 대한 국제 사회의 관심은 한풀 꺾인 듯합니다. 하지만 아프간 여성들은 그곳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일부 용감한 여성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3일(현지 시각) 50여명의 아프간 여성들이 카불의 국방부 건물 앞에 모여 대통령궁까지 행진하며 거리 시위를 벌였다고 합니다. 탈레반이 착용을 강제하는 부르카(눈 부위의 망사를 제외하고 머리부터 발목까지 덮는 의상)나 아바야(얼굴을 제외하고 목부터 발끝까지 가리는 검은색 긴 통옷)를 착용하지 않고 히잡만 쓴 채로요. 이들은 “새 내각에 여성을 포함하라” “여성의 일할 권리를 보장하라” 같은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었습니다.

[부르카 벗어던진 아프간 여성들 “일할 권리 보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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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이 3일(현지 시각) 수도 카불 시내에서 탈레반 정권에 그들의 권리를 보호할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탈레반의 과거 5년 통치(1996∼2001년) 시절 여성들은 교육·일할 기회를 빼앗기고, 전신을 가리는 부르카 없이는 외출이 불가능했으며 강제 결혼도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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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속 여성들의 시위 사진은 데자뷔를 일으켰습니다. 약 2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 ‘천상의 소녀(2003)’에도 유사한 장면이 나오거든요.

하늘색 부르카를 입은 여성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벌이는 장면입니다. 이들은 “일하고 싶다” “일할 권리를 달라”고 외칩니다. 2021년 9월 카불에서 벌어진 거리 시위와 크게 다르지 않은 요구입니다. 거리에 있던 한 소년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세상이 변하는 걸 똑똑히 봐두세요”라고 말하지만, 곧 화면에 탈레반이 나타나 시위 진압에 나섭니다. 여성과 아이를 향해 물대포와 최루탄을 쏘고, 이들을 체포해 철장 안에 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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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천상의 소녀' 도입부의 한 장면. '일자리를 달라'며 시위하던 아프간 여성들이 탈레반의 진압에 급히 도망치는 모습. /영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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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제61회 골든글러브 외국어영화상 수상작인 ‘천상의 소녀’는 1996~2001년 탈레반 집권기를 배경으로 합니다. 탈레반이 여성의 경제활동을 막자 열 두살 소녀는 남장을 감행합니다. 아버지는 전쟁에 나가 죽고, 가족은 할머니와 어머니 뿐이다 보니 생계를 꾸릴 사람이 없어서지요. 병원에서 일하던 어머니는 탈레반 집권 이후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소녀가 소년 ‘오사마’로 분하자 이들의 생활은 한결 편해집니다. 오사마가 있기에 어머니는 아들을 보호자 삼아 거리를 거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평화는 잠깐입니다. 동네 우유 가게에서 일하던 오사마는 어느 날 한 탈레반 무장대원의 눈에 띄어 소년을 위한 군대 교련 학교에 끌려가고 맙니다. 예쁘장한 외모로 의심과 따돌림을 당하던 소녀는 그곳에서 월경을 시작하고, 결국 여자라는 사실이 드러나 사형 위기에 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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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계를 위해 소년 '오사마'로 분한 소녀 /영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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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을 위해 결말은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아프간 출신 세디그 바르막 감독은 처음엔 이런 결말을 그렸다고 합니다. 나이가 지긋한 남성의 ‘n번째’ 부인이 되면서 사형을 면제받은 열 두살 소녀가 다른 부인들과 함께 탈출을 감행하고, 이들이 무지개 너머의 자유의 공간으로 향하는 결말을요. 하지만 감독은 “이는 진실하지 않았고, 거짓처럼 느껴졌다. 결국 그 장면을 덜어냈다”고 했습니다.

영화의 실제 엔딩은 2021년 현 상황과 맞물려 갑갑함을 증폭시킵니다. ‘천상의 소녀’는 “잊을 수는 없지만 용서하겠다”는 인용구로 영화를 시작하지만, 탈레반의 만행이 외신을 통해 속속 보도되는 상황에서 ‘용서’라는 말을 섣불리 꺼내고 싶지 않습니다. 머나먼 타국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은 이들의 역사를 잊지 않고, 벌어지는 일을 주의 깊게 지켜보며 꾸준히 연대와 지지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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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남장을 위해 머리를 자른 후 이를 화분에 심는다. /영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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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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