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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전도사’ 故조용기 목사… 지구 120바퀴 전도 여행, 5천명 심장병 수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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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가 14일 오전 별세했다. 사진은 지난 2009년 성탄절을 앞두고 조선일보와 인터뷰한 조용기 목사. /오종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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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기 목사는 한국 개신교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주인공이다. 1960년대 ‘희망’을 설교한 그의 교회에는 구름 인파가 몰렸고, 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한국 사회와 함께 성장했다.

첫 목회지는 서울 은평구 대조동. 훗날 장모가 된 최자실 전도사의 집 거실이었다. 1958년 5월 18일 당시 조용기 전도사, 최 전도사와 자녀 그리고 밭일하다 비를 피해 들어온 이웃 주부 등 5명이 사과 상자를 보자기로 덮은 강대상을 놓고 예배를 드렸다. 이어 대조동 언덕 깨밭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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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은평구 대조동 천막 교회 시절 산소통을 종 대신 사용하던 조용기(오른쪽) 목사와 장모인 최자실 전도사.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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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미약했지만 목회 초반부터 ‘조용기 신드롬’은 뜨거웠다. 당시 은평구 일대는 영호남에서 먹고살려고 상경한 가난한 사람이 많았다. 당시 개신교계의 일반적 분위기와는 달리 ‘방언(方言·성령의 힘으로 말한다는 내용을 알 수 없는 말)’과 ‘신유(神癒·신의 힘으로 병이 낫는 것)’를 강조한 조 목사의 ‘뜨거운 목회’는 이단 논쟁도 불렀지만 신자 수 급증으로 이어졌다. 창립 3년 만에 서대문로터리에서 부흥회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교회를 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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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말 신문지를 벽지로 붙인 천막 교회에서 조용기 전도사가 외국인 선교사와 설교하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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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1973년엔 국회의사당과 시범아파트 외에는 허허벌판이던 여의도에 교회를 신축해 옮겼다. 조 목사는 지난 2018년 교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본지와 한 인터뷰에서 “평생 가장 기뻤던 일이 여의도 예배당 입당”이라고 말했다. 당시 오일쇼크 여파로 공사가 수차례 중단됐지만 오히려 신자는 늘어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고 했다.

여의도 이전 후 교회 이름도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바꿨다. 이때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 신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입당 당시 1만명이던 신자는 1979년 10만명, 1984년 40만명을 넘어섰고, 1992년엔 70만명을 넘어 기네스북에 세계 최대 교회로 등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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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회'에서 조용기 목사가 설교하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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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기 목사의 목회 스타일은 ‘희망 목회’로 불린다. 조 목사가 목회의 첫걸음을 내딛던 1960년대는 한국 경제도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때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면서 농촌을 떠나 서울로 시민들이 몰리는 이농 현상이 본격화했다. 이 시기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어렵게 뿌리내리던 이들에게 조 목사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며 ‘희망’을 설교했다. 조 목사는 생전에 “저 스스로 가난이 지긋지긋했다. 가난에 한이 맺혀 천당과 지옥 이야기보다는 용기와 희망을 설교하려 애썼다. 부자 교회 못 가고 우리 교회 온 가난한 사람들이 용기와 희망을 얻고 위로를 받는 것이 제게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교회 성장의 비결로 ‘여성 구역장의 활약’을 꼽기도 했다. 여성들이 전도 일선에 나서고 평신도 조직의 책임을 맡으면서 비약적 성장이 이뤄졌다는 뜻이다.

이병철, 정주영, 김우중 등 기업인들이 세계 시장을 누빌 때 조 목사는 지구 120바퀴 거리를 날아 세계 선교에 나섰다. 대조동 천막 교회 시절부터 세계 선교를 꿈꿨던 조 목사는 “우리나라가 자동차, 비행기는 못 만들어도 복음과 예수를 전하는 일에서는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고 한다. 조 목사의 경상도식 억양 영어 설교엔 구름 인파가 몰렸다. 브라질 상파울루 집회에는 150만명 이상이 운집하기도 했다. 해외에서 그는 ‘폴 조’ ‘데이비드 용기 조’로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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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평양에서 열린 조용기 심장병원 착공식 모습.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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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규모가 커지면서 사회봉사 활동에도 나섰다. 1980년대부터 국내와 동남아 등 심장병 어린이 수술을 도운 것이 5000명에 이른다. IMF 구제 금융 사태로 실업자와 노숙자가 속출하던 1990년대 말에는 금 모으기 운동에도 앞장섰다. 1999년엔 국내외 구제 활동을 위한 NGO 굿피플을 창립했고, 2007년에는 평양에 심장 전문 병원을 착공했다. 그는 생전에 “병원 이름에서 내 이름은 빼도 된다”며 병원 설립에 큰 관심을 보였지만 남북 관계 악화와 대북 제재 등의 여파로 병원은 아직 완공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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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기(오른쪽) 목사와 후임 이영훈 목사. 조 목사는 만 70세이던 2006년 이영훈 목사를 후임으로 선출하고 담임목사직을 물려줌으로써 대형 교회 담임목사직 승계의 모범을 보였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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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의 교회인 만큼 한때 조 목사의 은퇴 여부가 사회적 관심을 끌기도 했다. 원래 교회가 속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기하성) 교단의 목사 정년은 75세였다. 조 목사는 만 70세이던 2006년 당회의 투표를 거쳐 이영훈 목사를 후임자로 뽑았다. 이영훈 목사는 3년간 담임목사 서리 기간을 거쳐 2009년 2대 담임목사로 취임했다. 이 목사 취임 후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지교회를 독립시켜 40만명 규모로 축소했으나 이후 다시 교인이 늘어 현재는 57만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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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가 지난 2005년 서울 상암경기장에서 열린‘세계 평화, 민족 구원 10만명 기도대성회’에 참석해 인사하고 있다. 조 목사는 희망을 불어넣는 설교로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세계 최대의 교회로 성장시키고 세계 70여 국가에서 전도집회를 열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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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목회 인생을 한마디로 ‘기적’이라고 정의했던 조 목사는 지난 2018년 본지 인터뷰에서도 ‘희망’을 거듭 강조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희망을 주셨습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꿈을 잃지 마세요. 긍정적 믿음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말하고, 긍정적으로 행동하면 우리 민족은 반드시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멋진 민족입니다.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고 마음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저 위에 계시는데 안 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고생은 반드시 따라옵니다. 고난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고난을 각오하고 나가면 미래는 이뤄집니다.”

조 목사의 유족은 희준·민제(국민일보 회장)·승제(한세대 이사) 등 세 아들이 있다. 부인 김성혜 전 한세대 총장은 지난 2월 먼저 세상을 떠났다.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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