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4 (금)

“예끼! 사또란 놈이 땅을 다 줍줍하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뮤지컬 리뷰] 판

때는 온 나라에 역병이 돌던 19세기 말 조선. 흉흉한 세상을 풍자하는 패관소설들이 퍼지자 ‘불온한 책들을 다 거둬 불태우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양반가 자제 달수는 이야기로 여인들을 홀린다는 전기수(소설을 읽어주고 돈을 버는 사람) 호태를 만나 ‘금지된 이야기의 맛’에 빠져든다.

조선일보

뮤지컬 ‘판’은 19세기 조선 제일의 이야기꾼을 통해 지금 이곳의 현실을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낸다. 코로나와 LH 사태 등이 등장한다. /정동극장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7일 정동극장에서 개막한 뮤지컬 ‘판’은 젊고 혈기 방장한 마당놀이다. 놀이패는 “손이 있으면 박수 한번 주시게~”로 관객을 무장해제시키곤 주막을 겸한 매설방(이야기방)에서 판을 펼친다. 이야기를 파는 것이다. 화끈하게 야릇하게 은밀하게. 달수는 듣는 이의 애간장을 녹이는 낭독의 기술을 익힌다.

마당놀이가 지닌 매력 중 으뜸은 현실 풍자다. 3년 전 국정 농단과 블랙리스트를 다뤘던 ‘판’은 이번에도 19세기 조선을 빙자해 지금 여기를 비꼰다. 주막에 들어갈 때 명부를 작성하거나 인증을 받아야 하는 방역 수칙부터 한국토지주택공사(LH) 임직원의 부동산 투기까지, 비유는 찰떡이고 풍자는 신랄하다. 그 한 토막은 이렇다.

백성들은 역병으로 시름에 젖어 있는데 사또란 놈이 못 쓰는 땅을 웃돈까지 얹어 줍줍하고 있다지 않은가! (예끼, 그런 놈이 어딨어? 하자 합창이 흘러나온다) “두껍아 두껍아 헌 땅 줄게 새 집 다오~” (사또, 새 집 얻었으면 됐지 또 뭐가 그리 바빠?) 버드나무 좀 심어야겠네. 빼곡하게 꼼꼼하게. (개발 정보 미리 알고 알박기 하는 거 아니냐고 따지자) 살다 보니 벼락처럼 신도시 호재를 만난 걸 어떡합니까!

조선일보

정동극장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판'. LH 사태를 풍자하는 대목이다. /정동극장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폭염과 짜증을 몰아내는 청량감이 있었다. 사또가 “어차피 두어 달만 지나면 사람들은 다 까먹는다니까” 하며 뱉는 재채기 소리마저 “엘에이취(LH)!”였다. 객석엔 웃음이 흥건했다. 제작진은 “(LH 사태 풍자는) 공공의 이익이 존중받고 공정한 사회가 회복되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했다.

그릇은 비싼 게 좋지만 책은 손때 묻은 게 제일이다. 이 뮤지컬은 마약이나 총기가 아니라 이야기를 암거래하는 세계를 흥미진진하게 그렸다. 내시인 줄 모르고 혼인한 여인, 줄타는 여자 광대 스토리도 꼭두각시놀음, 판소리, 가면극 등으로 생동감 있게 풀어냈다. 목숨 걸고 이야기를 펼치는 마지막 장면에선 가슴이 서늘해진다. 공연은 9월 5일까지.

[박돈규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