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1 (화)

교황을 들러리로 만든 나폴레옹, 유럽을 가족기업처럼 주물렀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주경철의 히스토리아 노바] [43] [나폴레옹 다시 보기] [중] 제국의 끝없는 전쟁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은 무력 팽창을 시도했다. 우선 프랑스혁명 중 상실한 식민 제국을 재건하겠다며 1801년 말에 처남 르클레르 장군이 지휘하는 2만명의 원정군을 카리브해의 생도맹그섬에 파견했다. 이 원정은 재앙으로 끝났다. 프랑스혁명 당시 해방되어 이미 자유의 맛을 알게 된 흑인들은 다시 노예제로 돌아가느니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여기에 가공할 만한 감염병인 황열병이 퍼져 엄청난 수의 프랑스군이 희생됐다. 결국 프랑스군은 항복하고 생도맹그는 1804년 1월 1일 세계 최초의 해방 노예 출신 흑인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식민 제국 회복이 가망 없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이참에 루이지애나도 처분했다. 원래 프랑스령 식민지였던 이 광대한 땅은 7년전쟁(1756~1763) 패배로 스페인에게 넘어갔다가 나폴레옹이 되찾으려 했지만, 강력한 영국 해군 때문에 지켜낼 자신이 없었다. 영국으로 넘어가게 내버려두느니 차라리 미국 정부에 판매했다. 1803년 매매 협정을 체결하는 자리에서 프랑스 외무장관 탈레랑은 미국 대표 먼로에게 “싼 물건 잘 사신 겁니다” 하고 덕담을 했다. 틀린 말이 아니다. 미국은 1500만달러를 써서 순식간에 영토가 2배로 커졌다.

조선일보

황제가 되는 나폴레옹과 조연으로 밀려난 교황… 유럽 권력의 정점이 바뀌는 순간 - 프랑스가 영국을 정복하려 상륙 훈련을 진행하는 동안, 영국의 나폴레옹 암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나폴레옹은 반혁명 세력을 봉쇄하기 위해 스스로 황제가 되겠다는 계획을 국민투표에 부쳤고, 압도적 찬성을 이끌어냈다. 1804년 12월 2일, 교황 비오 7세가 참석한 가운데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대관식이 열렸다. 스스로 왕관을 집어들어 교황보다 황제가 우위에 있음을 천명한 나폴레옹이 조제핀에게 황후의 관을 씌워 주는 모습을 그린 자크루이 다비드의 그림‘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열린 나폴레옹 1세 황제와 조제핀 황후의 대관식’(부분). 루브르 박물관 소장. 관을 들고 선 나폴레옹 뒤편(그림에서 오른쪽)의 교황 등 참석자들의 초상도 명확히 그려졌다. /위키피디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프랑스는 영국을 정복하기 위해 20만명 가까운 병력을 영불해안 근처에 주둔해 놓고 상륙 훈련을 했다. 영국은 망명 와 있던 왕당파 지도자 조르주 카두달(Georges Cadoudal)을 프랑스 내에 잠입시켜 나폴레옹을 살해하려 했다.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나 카두달은 처형되었다. 문제는 내심 왕정 복고에 찬성하던 프랑스 장군들 다수가 이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것이다. 나폴레옹은 등 뒤에서 비수를 꽂는 영국과 내부의 적 왕당파를 싸잡아 공격하며 여론몰이를 했다. 혁명을 되돌려 과거로 회귀하려는 반동 세력을 원천 봉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 자신이 황제로 등극해서 부르봉 왕실의 회귀를 막겠다는 희한한 안을 내놓았다.

이 계획을 관철하는 데 국민투표를 이용했다. “현재 공화정의 제1집정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 황제가 된다”와 “황제의 권위는 세습한다”는 두 사안에 대해 찬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하니 99% 찬성했다. 나폴레옹은 합법적으로 황제가 되었다. 프랑스인들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몰표를 주었을까? 10년 이상 지속된 혁명과 전쟁 그리고 내전에 지쳐서 차라리 강력한 인물이 전권을 틀어쥐고 안정을 찾아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이런 흐름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미약한 지배자의 통치를 받는 것만큼 가공할 재앙은 없다.”

1804년 12월 2일 일요일,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황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 행사를 위해 교황 비오 7세가 파리로 왔다. 나폴레옹은 무릎 꿇고 교황으로부터 머리, 팔, 손에 기름 부음을 받는 의식을 치렀다. 이제 황제는 ‘기름 부음 받은 자(그리스도)’로서 신의 뜻을 이 땅에 펼치는 신성한 통치자가 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국왕의 대관식을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다만 대주교가 아니라 교황이 의식을 집전하여 격이 더 높아졌다). 그러더니 벌떡 서서 자기 손으로 황제 관을 집어 스스로 머리 위에 쓰는 제스처를 했다.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유럽 역사 내내 갈등을 일으킨 문제 중 하나가 황제와 교황 중 누가 더 상위권을 가지느냐인데, 나폴레옹은 스스로 답을 제시했다. 교황이 황제를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황제가 된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천명한 것이다. 이어서 나폴레옹이 조제핀에게 황후의 관을 씌어주었다. 다비드의 그림이 바로 이 장면을 포착하여 그렸다.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이 모여 있고, 그 주변에 정부 고위직 인사들과 새로 임명된 장군들, 재편성된 도와 시청을 맡은 도지사들과 시장들도 포진해 있다. 이 그림은 황제를 중심으로 가족과 제국 지휘자들이 단합하여 새 체제에 봉사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조선일보

전쟁터에선 천재, 아우스터리츠 전투 압승으로 이끈 나폴레옹 - 1805년 12월 2일, 나폴레옹1세의 프랑스군은 지금의 체코 땅인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퇴한다. ‘세 황제의 대결’로 불리는 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나폴레옹은 당대의 신화가 됐다. 프랑수아 제라르의 그림‘아우스터리츠 전투’(부분), 베르사유궁 소장. /위키피디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는 프랑스의 황제 체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명목상 최고 지배자였던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오스트리아 황제’로 격하됐다. 영국과 러시아만 반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폴레옹은 제국을 자기 식으로 확대·개편해 나갔다. 1805년 이탈리아 공화국을 왕국으로 개편하고 자신이 왕위를 차지했다. 이탈리아 일부 지역들은 아예 프랑스의 도(道)로 편입했다. 이와 같은 팽창주의에 주변국들이 다시 긴장했다. 영국,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대불 동맹을 맺어 위협하자 나폴레옹은 18만명에 달하는 대군(大軍, Grande Armée)을 구성한 후 울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이어서 아우스터리츠에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했다. 대승을 기념하기 위해 파리 시내에 두 개의 개선문(카루젤과 에투알)을 건설했다.

외무 장관 탈레랑은 이런 정도에서 무력행사를 멈추고 유럽의 균형을 유지하는 정책을 펴라고 권했지만, 나폴레옹은 생각이 달랐다. 내친김에 힘으로 더 밀어붙이자는 것이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왕국으로 쳐들어가 국왕을 축출하고 자기 형 조제프를 새 왕으로 앉혔다. 네덜란드에는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를, 베르크-클레브 공령에는 처남 뮈라와 여동생 카롤린(Caroline)을, 또 신생 베스트팔렌 왕국에는 막내 동생 제롬을 지배자로 앉혔다. 유럽 주요 국가들을 재벌가의 가족 기업처럼 운영한 것이다.

모든 나라들이 고분고분 따르지는 않았다. 라인 지방의 노른자 땅을 빼앗겨서 발전의 싹이 잘린 프로이센의 반발이 제일 거셌다. 과감하게 프랑스군에 도전했으나 막상 전쟁에 돌입해 보니 프로이센은 과거 명성을 떨치던 군사 강국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나 전투(1806년 10월 14일)에서 승리를 거둔 나폴레옹군은 베를린에 입성했다. 자신감에 넘쳐나는 나폴레옹은 영국을 경제적으로 압박하겠다며 대륙의 모든 국가들에게 영국과 교역을 금지하는 대륙 봉쇄 정책을 폈다. 이에 저항하는 러시아군을 상대하여 힘겨운 전쟁을 벌였다. 사실 나폴레옹군이 매번 손쉽게 대승을 거둔 것은 결코 아니다. 가까스로 러시아 대군에 승리를 거둔 다음 차르 알렉산더 1세와 담판을 벌여 틸지트 평화 조약을 맺었다(1807). 러시아는 엘베강 동쪽의 프로이센 영토 일부를 넘겨받고 대신 대륙 봉쇄 정책에 동참하기로 했다.

다음에는 이베리아 반도로 침공해 들어가서 스페인과 동맹을 맺어 포르투갈을 분할하더니, 스페인 국왕을 축출하고 조제프를 국왕으로 앉혔다. 형님의 보직을 나폴리왕에서 스페인왕으로 변경한 것이다. 바그람(Wagram)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에 승리한 후에는 오스트리아 영토를 일부 떼어내서 바르샤바 공국에 넘겨주었고, 네덜란드는 아예 프랑스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런 식으로 편집한 제국 체제를 온전하게 지탱할 수 있을까?

칼로 일어난 자는 칼로 망할 때까지 멈추려 하지 않는다. 한번 시작한 군사 정복은 적이 없어질 때까지 지속해야 한다. 1811년 즈음이 권력의 정점이었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선언했다. “5년 내 나는 세계의 지배자가 될 것이다. 오직 러시아만 남을 텐데 이 나라마저 파괴할 것이다.” 과연 그럴까?

<고야의 ‘5월 3일’>

조선일보

프랑스군의 학살 고발한 '5월 3일' -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벌어진 나폴레옹군의 학살을 그린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5월 3일’(부분). 프라도 미술관 소장. /위키피디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1808년 나폴레옹의 형 조제프가 스페인 왕이 되었을 때 스페인 국민들은 극도로 분노했다. 나폴레옹은 조제프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가장 말 안 듣는 도시 두어 곳을 약탈하세요. 그들에게는 본보기가 될 테고 병사들에게는 즐거움을 안겨줄 겁니다.” 마드리드에서 봉기가 일어나자 나폴레옹의 매제(여동생의 남편) 조아생 뮈라 장군은 군을 동원하여 강경 진압에 나섰다. 5월 3일, 새벽 시간에 수백명의 시민들이 처형되었다. 스페인의 화가 고야는 처음에 프랑스혁명의 이상과 계몽주의 철학에 찬성했지만 곧 프랑스군의 참혹한 탄압 앞에서 몸서리쳤다. 후일 그는 폭군에 저항하는 영웅적인 행위를 화폭에 담아 영원히 남기겠노라고 결심했다. 학살의 현장은 온통 암흑이어서 온 세상이 죽은 듯하다. 나폴레옹군이 사용하는 군용 랜턴(당시 개발된 군사 용품)의 기계적 빛이 총살 직전의 희생자를 환하게 비추고 있다. 그의 오른손에는 예수의 성흔(聖痕)처럼 상처가 나 있다.

조선일보

고야의 그림 '5월 3일'에서 총살 직전 희생자의 손을 확대한 모습. 예수의 성흔(聖痕)처럼 상처가 나 있다. /위키피디아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