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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 (금)

"量 아닌 質로 가라"…제품 500억 불사르며 일류 삼성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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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희 회장 (1942~2020) / 前 삼성 출입기자가 본 이건희 ◆

매일경제

25일 별세한 이건희 회장이 2004년 방호복을 입고 반도체 생산 현장을 방문한 모습. [사진 제공 = 삼성전자]


1978년 어느 날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 모건스탠리 본사 회장실에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과 이건희 부회장이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는 프랭크 페티토 모건스탠리 회장 등 일부 경영진이 배석했다. 이 자리에서 이병철 선대 회장은 "여기 제 삼남(三男)이 삼성 회장이 될 때쯤이면 삼성이 세계 톱 기업이 될 것"이라며 삼성 경영에 도움이 될 조언을 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월가에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선대 회장은 아들 이건희의 비범함을 진작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이 승계 결정은 훗날 삼성과 한국 재계의 운명을 갈랐다. 이건희 회장은 한국 경영사에 큰 획을 적어도 3개 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첫째는 '프랑크푸르트 신경영'으로 촉발된 질 경영, 둘째는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담은 인재 경영, 셋째는 글로벌화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면서 전면적인 변화와 혁신을 주문한 1993년 6월 7일 신경영 선언은 사실상 그해 2월 LA 회의에서 촉발됐다. 이 회장은 임원들과 LA 가전매장을 방문해 매장 한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천덕꾸러기 신세로 방치된 삼성 전자제품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 회장은 3월 초 도쿄에서도 삼성 제품 현주소를 확인한 뒤 6월 4일 도쿄 오쿠라호텔에서 밤샘 회의를 진행했다. 이때 일본인 고문 후쿠다 다미오 씨가 '경영과 디자인'이라는 보고서를 이 회장에게 건넸고, 격분한 이 회장은 독일로 임원 200여 명을 긴급 소집해 "양 위주의 사고방식을 버리고 질 위주의 경영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 저서 '이건희 에세이'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1995년 삼성전자가 판매한 무선전화기 중 불량품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나는 즉시 시중에 내보낸 15만대 전량을 새 제품으로 교환해주거나 회수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회수한 제품을 공장 전 직원이 보는 앞에서 소각하도록 했다." 삼성전자 구미공장에서 벌어진 '불량제품 화형식'은 타성에 젖어 현실에 안주했던 삼성 임직원들에게 경종을 울린 충격적 사건이었다. 시가 500억원에 달하는 제품이 잿더미로 변한 뒤 삼성 생산 현장은 환골탈태했다.

이 회장은 1993년 7월 7일 일명 7·4제(아침 7시에 출근하고 오후 4시에 퇴근)를 도입했다. 일하는 방식에도 파격을 줘 업무 시간은 줄이되 질을 높이고 임직원 마인드를 바꾸자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이 회장은 2011년 4월 21일, 삼성전자 서초사옥으로 첫 출근해 42층 회장 집무실에서 업무를 봤다. 당시 기자는 이 회장의 출근 동선을 옆에서 밀착 취재한 경험이 있다. 그는 서초사옥의 삼성전자 체험매장 '딜라이트숍'에 들러 직원들을 격려했다. 제품과 현장에 대한 열정은 한결같았고 표정에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이 회장은 매년 선진 제품 비교 전시회를 열어 1등 제품의 DNA를 심어주고자 했다.

이 회장의 신경영을 뒷받침한 자양분은 인재 경영이었다. 1등 제품을 만들려면 사람을 일류로 만들어야 한다는 게 이 회장의 한결같은 소신이었다. 그는 초일류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엄청난 연봉과 인센티브를 내걸었다. 삼성 회장비서실 인사팀장을 역임했던 황영기 전 삼성증권 사장은 "S급 핵심 인재에게는 회장님보다 월급을 더 많이 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인재에 대한 이 회장의 욕심은 대단했다. 매년 삼성 계열사 사장단을 평가할 때 큰 비중을 두는 잣대가 'S급 인재를 얼마나 영입했는가'였다.

이 회장은 2003년 인재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하면서 "한 명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린다"고 말했다.

인재 경영과 관련한 또 다른 에피소드. 2000년대 초 이 회장은 계열사 사장단에 '5~10년 뒤 미래 먹을거리를 준비해 발표하라'고 긴급 지시했다. 계열사들이 열성적으로 발표하는 것을 말없이 경청한 그는 이런 반응을 내놨다. "내일 벌어질 일도 모르는데 여러분이 5~10년 후를 어떻게 알겠나. 그래서 사람이다. 사람을 제대로 뽑아놓으면 미래를 대처할 수 있다." 당시 발표했던 사장들은 상당히 당황했다고 한다. 이 회장을 보필했던 삼성 인사 담당자들은 "이 회장이 본인 시간 중 80~90%는 인사에 쓸 정도였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직원 채용 때 모든 차별을 없애라고 지시했다. 성, 인종, 학력 등 벽을 허물라는 주문이었다. 이 같은 이 회장 철학은 삼성 공채제도를 열린 채용으로 바꾸는 계기가 됐다.

삼성이 국내 무대를 넘어 글로벌을 지향하는 발판을 마련한 것도 이 회장이었다. 글로벌 삼성의 토대가 된 '지역전문가제도'가 대표적이다. 이 회장은 "지역전문가를 만들라고 몇 번을 주문했다"며 "회장이 된 후인 1988년에 떠들었는데도 안 바뀌자 1989년인가 1990년에 고함을 질러버렸다. 그랬더니 그날로 당장 만들어 오더라"고 한 적이 있다. 세계 각지에 젊은 삼성인들을 파견해 다른 나라 문화와 언어를 배우도록 한 이 제도는 당시 재계에 상당한 파장을 낳았다. 삼성 고위 임원은 "연간 수백억 원에 달하는 비용이 들어갔다"며 "미래 글로벌 인재를 육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 회장은 저서에서 미래 변화에 대한 통찰력을 담은 지혜를 비롯해 혁신 능력, 정보력을 21세기 미래 경영자의 조건으로 제시했다.

또 하나가 국제 감각이었다. 현재 삼성은 외국 우수 인력들이 넘치는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이 됐다.

이 회장은 일본을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았지만 동경의 대상으로 머물게 하진 않았다. 결국 삼성은 지일(知日)을 넘어 극일(克日)을 이뤄냈다.

매일경제

[황인혁 증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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