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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신안군의 도전…미술계는 지금, 그섬에 가고 싶다 [도재기의 현대미술 스케치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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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김환기의 고택이 있는 안좌도, 조희룡의 유배지인 임자도,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쓴 흑산도, 농민·인권·독립운동이 벌어진 암태도와 여러 섬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하의도, 민중미술가 홍성담의 신의도…풍성한 역사·문화적 자원의 섬 ‘천사의 섬’이 뮤지엄으로 거듭난다. 미술관·박물관·복합문화관광타운으로 구성되는 ‘1도 1뮤지엄’ 아트프로젝트, 신안군의 특별한 도전에 미술계와 지방자치단체가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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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노을미술관(압해도). 신안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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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계 안팎에서 알음알음 관심을 모으는 대규모 ‘아트 프로젝트’가 있다. 미술계를 넘어 일부 지방자치단체들도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넉넉지 않은 재정자립도의 군 단위 지자체가 추진하는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이례적으로 주목받는 것이다.

전남 신안군의 ‘1도 1뮤지엄 아트 프로젝트’다. 흑산도와 홍도·가거도·하의도·비금도·압해도·안좌도·증도·암태도 등 1025개의 섬(유인도는 76개)으로 이뤄진 한반도 서남단 끝자락, 그 신안군이다. 이 프로젝트는 이름처럼 섬 20여개에 각각 공공·민간 뮤지엄(미술관·박물관)을 만들어 ‘문화예술의 섬’으로 거듭나겠다는 취지다.

‘국민화가’ 김환기의 고택이 있는 안좌도, 매화도로 유명한 조희룡의 유배지인 임자도, 정약전이 <자산어보>를 쓴 흑산도, 농민·인권·독립운동이 벌어진 암태도와 여러 섬들, 김대중 전 대통령의 하의도, 민중미술가 홍성담의 신의도를 비롯한 현대미술가들의 고향 섬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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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4섬 수석미술관(자은도). 도재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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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마다 지닌 풍성한 역사·문화적 자원을 발굴하고 아직 때묻지 않은 천혜의 자연생태환경을 활용해 국제적으로 유명한 ‘예술의 섬’ 일본 나오시마를 뛰어넘겠다는 포부다. 이미 10여곳은 프로젝트가 마무리돼 사람들이 찾고 있다. 사실 지방자치제 이후 전국의 광역·기초지자체들은 문화예술을 통해 지역 활성화를 꾀했다. 하지만 상당수는 여러 이유로 기대만큼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신안군의 ‘특별한 도전’은 더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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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봉 조희룡미술관내부(임자도). 신안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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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사의 섬’, 뮤지엄으로 거듭난다

‘천사의 섬’은 신안군 브랜드다. 1025개의 섬 중 나무·풀이 자라는 섬이 1004개여서 ‘천사’이고, 여기에 누구나 좋아하는 ‘천사(Angel)’란 의미를 중첩시켰다. 신안군의 특성을 살려낸 성공적 브랜드로 평가받는다. 그 ‘천사의 섬’ 신안의 ‘1도 1뮤지엄’ 아트 프로젝트는 모두 24개의 뮤지엄으로 구상됐다.

미술관 11개, 박물관 12개, 복합문화관광타운 1개다. 24개 중 공공뮤지엄이 21개, 민간뮤지엄이 3개이며 신축과 기존 건축물 리모델링으로 진행된다. 11개는 이미 사업이 완료됐고, 11개는 추진 중이며, 2개는 계획 중이다. 완료된 곳은 압해도의 저녁노을미술관과 암태도의 에로스서각박물관, 자은도의 수석미술관·세계조개박물관, 하의도의 천사상미술관, 비금도의 이세돌바둑박물관, 한국화가 박득순이 고향 흑산도에 세운 사립 박득순미술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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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도형 미술관’이 인근에 들어설 김환기 고택(안좌도). 신안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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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해도 천사섬분재공원 안에 자리한 저녁노을미술관은 한국화가 우암 박용규의 작품 기증을 계기로 만들어졌다. 기획전시실·상설전시실·카페 등으로 구성된 미술관은 산책하기 좋은 분재공원과 더불어 미술관 2층에서 조망하는 바다 위의 아름다운 저녁노을로도 유명하다. 연 15만여명이 찾는다.

자은도 뮤지엄파크 내에 지난 8월 문을 연 세계조개박물관은 3000여종 1만1000여점의 희귀한 조개·고둥 표본과 이를 응용한 생활공예품을 기반으로 한 자연사박물관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신기해하며 만족감이 높다. 바로 옆의 ‘1004섬 수석미술관’은 수석을 전시한 실내 미술관과 정원석·분재·야생화로 꾸민 넓은 수석정원으로 구성됐다. 천사상미술관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민주화운동과 노벨 평화상 수상을 기리고자 최바오로 등 국내외 작가들의 천사 조각상 300여점이 하의도 일대에 설치된 노천미술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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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피니또 뮤지엄’부지(자은도). 도재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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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미술계가 주목하는 것은 새롭게 들어설 뮤지엄이다. 어떤 주제로, 어떻게 선보일지 관심이 쏠리는 것이다.

우선 자은도 둔장해변을 끼고 2024년 개관 예정인 ‘인피니또 뮤지엄’이 있다. ‘인피니또’는 이탈리아어로 한계가 없는 ‘무한’을 뜻한다. 이탈리아에서 활동 중이며 2018년 한국인 최초·동양인 3번째로 ‘프라텔리 로셀리’상을 받은 조각가 박은선과 세계적 건축가이자 서울 삼성미술관 리움·강남 교보타워 설계로도 잘 알려진 마리오 보타가 참여하는 미술관이다. 보타가 여러 번 현장을 찾아 설계 중인 미술관은 전시실과 야외 조각전시장·정원·카페 등으로 이뤄진다. 미술관 바로 앞에는 무인도들을 연결한 인도교로 바다와 갯벌 위를 걸으며 독특한 풍광을 즐길 수 있어 최근 관광명소로 떠오른 ‘무한의 다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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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은 국내외 작가 10명과 함께 12곳에 예수의 12사도 이름을 본떠 건축물을 짓고, 이들을 연결한 길을 만들었다. 이른바 ‘섬티아고 순례길’ ‘12사도 순례길’이다. 사진은 김윤환 작가의 ‘건강의 집-베드로’ / 신안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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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은 국내외 작가 10명과 함께 12곳에 예수의 12사도 이름을 본떠 건축물을 짓고, 이들을 연결한 길을 만들었다. 이른바 ‘섬티아고 순례길’ ‘12사도 순례길’이다. 사진은 강영민 작가의 ‘사랑의 집-시몬’. / 도재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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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인권평화미술관은 신의도의 폐교를 리모델링하고 일부는 신축된다. 하의도·신의도 지역은 조선시대부터 1994년 등기가 마무리될 때까지 무려 300여년에 걸친 농민들의 농지탈환운동을 비롯, 불합리한 사회체제에 대한 저항을 통한 인권과 평화정신으로 상징된다. 한때 ‘홍성담미술관’으로 추진되다 작가와 미술계 안팎의 건의로 지역 특성을 반영하고, 일본 오키나와·대만 등 동아시아의 인권과 평화를 주제로 한 전시실·국내외 작가 작업실 등으로 조성된다.

김환기의 고향 마을로 ‘김환기 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251호)이 있는 안좌도 읍동리의 신촌저수지 일대에는 군도형(플로팅) 미술관이 들어선다. 김환기가 일본에서 유학하고 서울·뉴욕에서 작품활동을 하던 시기 늘 그리워한 고향이다. 특히 ‘환기 블루’로 불리는 김환기 작품 특유의 푸른색은 안좌도 앞바다에서 유래됐다는 분석이 있다. 현재 고택은 1920년대 말 백두산에서 가져온 목재로 지은 건물들 중 안채만 남아 있다. 안채 바로 옆 화실로 쓰던 건물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주민이 거주하는 현대주택으로 바뀐 상태다. 저수지 위에 세워질 플로팅뮤지엄은 김환기 고택과 더불어 그의 삶과 작품세계를 기리는 공간이다. 임자도 대광해수욕장 인근의 조희룡미술관은 리모델링을 거쳐 재개관한다. 조희룡(1789~1866)은 임자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활발하게 작업했고, 미술관에는 그의 작품과 기록물, 특히 미디어아트와 인터랙티브 영상으로 재탄생한 매화도 등이 선보일 예정이다.

이 밖에 한국춘란박물관·황해교류역사관·전통한선박물관 등이 추진 중이고, 지도에는 자수박물관을 계획하고 있다. 총사업비는 국비와 도비·군비·민자 등 1382억원으로 416억원의 투자가 이뤄졌다. 신안군은 경제적 생산·부가가치 유발 3700억여원, 일자리 3300여개의 파급효과를 기대한다.

신안에는 이 프로젝트와 별도로 전남도 공모사업으로 이뤄져 이미 전국적으로 이름난 문화예술공간들이 있다. 국내외 작가 10명이 참여해 대기점도·소기점도·소악도·진섬·딴섬의 바닷가·언덕·호수·마을길 등에 세운 자그마한 건축물(예배당)이 대표적이다. 지역 주민의 90% 이상이 기독교인이란 특성을 살려 12곳에 예수의 12사도 이름을 딴 건축물을 짓고, 이들을 연결한 걷는 길을 만들었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올려 ‘섬티아고 순례길’ ‘12사도 순례길’로 불리는 독특한 길은 종교를 초월해 많은 이들이 찾아 걷고 또 쉬면서 사색과 명상의 시간을 갖는다. 저마다 특색 있는 작품을 남긴 작가는 강영민·김강·김윤환·박영균·손민아·이원석과 장 미셸 뤼비오·브루노 푸르네·얄룩 마스·파코 슈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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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은 국내외 작가 10명과 함께 12곳에 예수의 12사도 이름을 본떠 건축물을 짓고, 이들을 연결한 길을 만들었다. 이른바 ‘섬티아고 순례길’ ‘12사도 순례길’이다. 사진은 장 미셸 후비오 등의 ‘감사의 집-바르톨로메오’. / 신안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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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은 국내외 작가 10명과 함께 12곳에 예수의 12사도 이름을 본떠 건축물을 짓고, 이들을 연결한 길을 만들었다. 이른바 ‘섬티아고 순례길’ ‘12사도 순례길’이다. 사진은 손민아 작가의 ‘지혜의 집-가롯 유다’ 전경. / 도재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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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보다 미래를 위한 투자

1995년 지방자치제가 본격 시작되면서 전국의 많은 광역·기초지자체들이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주민들의 문화향유 기회 확대, 관광객 유치를 통한 지역경제 부흥과 활성화, 지역 이미지 개선 등이 주요 목표였다. 문화예술은 쇠락하고 죽어가던 지역을, 도시를 재생·부활시킬 수 있어서다. 특히 구겐하임미술관을 중심으로 도시가 재탄생해 ‘빌바오 효과’란 말까지 낳은 스페인의 빌바오, 베네세그룹이 주도해 지추미술관·이우환미술관 등을 세우며 예술의 섬으로 국제적 명소가 된 일본의 나오시마 등 각국의 성공 사례들도 있다.

하지만 상당수 지자체들의 프로젝트는 기대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톡톡한 성과를 얻는 곳들도 물론 있지만, 애물단지로 전락해 예산낭비라는 지적을 받는다. ‘문화예술의 힘’의 효과를 보지 못한 지자체들에는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원인이 있다. 눈에 보이는 ‘하드웨어’만 신경 쓸 뿐 훨씬 더 중요하지만 눈에는 잘 띄지 않는 ‘소프트웨어’를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다. 장기적이고 체계적이며 치밀한 추진이 아니라 단기간에, 특히 지자체장 임기 내에 성과를 내려 했다. 뮤지엄은 건립보다 운영이 핵심이다. 건립 비용보다 향후 운영비가 수십~수백배에 이르지만 지자체들은 안정적 조달 방안을 마련하지 않았다. 다채로운 콘텐츠 확보나 뮤지엄의 다양한 활용책, 지역 주민들의 주체적·적극적 참여 방안 등의 마련에도 무심했다.

단순히 보여주고 계몽시키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고 느끼며 평생교육이 이뤄지는 공간이라는 시대적 변화에 따른 뮤지엄의 기능과 역할에 대응하지 못하고, 여전히 공급자 시각에서 추진했다. 전문가들의 창의적 견해를 관료주의로 무산시키거나, 지자체장이 바뀌면 정책이 아예 없어지거나 왜곡되는 경우도 있다. 지역의 역사문화성, 자연환경적 특성을 살리지 않고 천편일률적인 벽화거리·조각공원 조성 등 ‘환경미화 수준’에 그친 프로젝트도 있다. 교량 건설 등과 달리 뮤지엄은 적어도 5년, 10년이 지나야 그 효과가 서서히 나타난다.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투자다.

지난 16일 압해도에서 만난 박우량 신안군수는 “기존 지자체들의 문제점, 우려하는 점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많이 준비했고 치밀하게 추진한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 아트 프로젝트는 신안의 특성을 살려 방문객들에게는 자연·문화예술 관광이라는 새 패러다임을 선보이고, 지역 주민들에겐 평생교육 기관이자 참여와 소통이 이뤄지는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추구한다”며 “여느 기반시설보다 긴 시간, 많은 행정력, 예산이 소요되지만 미래를 위해 포기할 수 없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지난해 천사대교 개통, 여객선 야간운항 등으로 육지와 신안의 섬들, 섬과 섬이 가까워지면서 뮤지엄들이 기반시설이자 관광자원으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며 “각계의 문의, 해외의 관심도 높아졌다”고 말했다.

실제 메이저 갤러리인 학고재는 신안에 미술관 건립을 검토 중이다. 최근 신안을 방문하고 또 서울에서도 박 군수를 만난 우찬규 학고재 대표는 “서로가 윈윈하는 게 중요하다”며 “아직은 검토 단계”라고 밝혔다.

‘1도 1뮤지엄’ 아트 프로젝트는 여느 군 단위 지자체와 달리 전문가를 예술감독으로 초빙해 추진되고 있다. 또 프로젝트와 연관된 전문가들의 토론회를 열어왔고, 다음달에도 관련 심포지엄을 개최하는 등 여러 의견을 모은다. ‘1도 1뮤지엄’ 아트 프로젝트라는 신안의 도전은 신안뿐 아니라 전국 군 단위 지자체들에도, 공공미술정책사에도 의미가 깊고 기대도 크다. 공공미술 프로젝트로서의 ‘문화예술의 힘’을 제대로 보여줬으면 좋겠다.

도재기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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