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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 (목)

[데스크에서] 최악 전세난, 누가 책임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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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진중언 산업1부 차장


후배 한 명이 대뜸 전화를 하더니 “전세 만기가 6개월 남았는데 보증금 3억5000만원 더 안 올려주면 집주인이 실거주하겠다는데 어떻게 하나요”라고 하소연했다. 대기업 부장인 지인은 “올해 12월 내 아파트에 처음 들어가 살려니까 세입자가 이사비 1000만원을 요구한다”며 “세입자한테 질린 집사람이 ‘청와대 앞에서 1인 시위라도 하고 싶다’더라”고 전했다.

‘전셋집 때문에 화병 나겠다’는 사람들이 주변에 넘친다. 올가을 전세난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시쳇말로 ‘역대급’이다. 입주한 지 30년이 다 돼가는 20평대 아파트 전세 매물을 보기 위해 대문 앞 복도에 10여명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진은 몇 번을 봐도 기가 막힌다.

7월 말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을 군사작전 치르듯 처리한 정부·여당은 ‘서민 주거 안정’을 이유로 내세웠다. 살던 집에서 2년 더 살고(계약갱신청구권), 전세 보증금도 최대 5%만 올려주면 되니(전·월세 상한제) 무주택 서민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부동산 시장은 절대로 정부의 순진한 기대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임대차법 개정에 앞서 많은 전문가가 정부에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시장에 나오는 전세 매물이 급감하고, 수급 불균형으로 전세 가격이 오르고, 각종 불필요한 사회 갈등이 빈번해질 수 있다고 했다. 이 경고는 불과 두 달여 만에 모두 현실이 됐다. 4400가구가 넘는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전세 매물이 고작 2~3개뿐이다. 임대차법 개정 전인 6월만 해도 360개가 넘었던 곳이다. 서울 어디를 가도 전셋집이 하도 귀해 매물이 나오면 집도 안 보고 계약금부터 보내는 일이 허다하다.

한두 달 사이 아파트 전셋값이 1억원 올랐다는 것은 뉴스거리가 안 된다. 집주인이 전셋집 구하는 사람에게 집을 보여주는 대가로 돈을 받는 신종 ‘갑질’이 등장했고, 세입자들은 “전세 계약 끝났을 때 순순히 집 빼주는 사람은 바보”라고 얘기한다. 집주인과 세입자가 서로 “소송 걸겠다”고 얼굴을 붉히는 경우가 늘고 있다.

결국 가장 큰 피해자는 무주택 서민이다. 세입자들은 ‘새 법 덕분에 2년 더 편하게 살겠다’고 안도하는 게 아니라 ‘이 집에서 쫓겨나면 어떻게 하느냐’며 불안해한다. 전셋집을 구하는 무주택자는 이전보다 훨씬 더 발품을 팔아야 하고, 무섭게 오른 전셋값 때문에 눈높이를 한참 낮춰야 할 판이다. 전셋값 상승은 결국 집값을 밀어올릴 가능성이 커 무주택자의 ‘내 집 마련’ 꿈은 더 어려워질 것이다.

졸속 임대차법 개정이 불러온 전세난에 대해 정부는 아무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고, 한 마디 사과도 들리지 않는다. “전세 구하는 분들의 어려움을 무겁게 받아들인다”고 말한 홍남기 부총리가 ‘전세 난민’이 될 처지에 놓였다는 뉴스에 “쌤통이다”라는 댓글이 달리는 게 지금 민심이다.

[진중언 산업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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