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우 | 글 쓰는 내과 의사. 책 저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명절이면 의사는 긴장한다.
명절은, 말하자면 특별 이벤트 기간이다. 특별 이벤트 기간에는 특별한 일이 많이 일어난다. 우리나라는 의료 접근성이 좋은 나라라서 명절은 질병의 발견에 큰 영향을 미친다. 다른 말로 하면 진단 건수가 명절을 끼고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숨어 있던 병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응급이든 비응급이든 차이가 없다.
이 기간 동안 응급실에는 '주 호소 : 전신무력감'의 노인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딱히 무슨 병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식이 섭취가 부족한 바짝 마른 어르신들이 많다. 오랜만에 고향집 부모를 보러 갔는데 쇠약한 모습에 깜짝 놀란 자식들이 모시고 오는 경우가 많다. 자녀들은 "제일 비싸고 좋은 수액으로 부탁한다"는 부탁을 첨언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부족한 효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입술 끝에는 미안함이 방울지어 뚝뚝 떨어진다.
소아 응급구역도 발 디딜 틈이 없다. 어린이들은 평소 구경 못 하던 명절 음식에 흥분했던 것 같다. 놀란 위장은 이 딱한 존재들을 찡그리게 하고 이곳으로 끌고 온다. 귀여운 아이들이지만 앞서 노인의 경우처럼 딱히 해 줄 치료가 없다. 그래도 새 몸이라 금세 낫는다. 만화영화 몇 편 보며 병실 침대에 누워 있으면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응급실 문을 나선다. 외상 케이스도 많다. 벌초 때문인지 톱 같은 날카로운 물체에 상해를 입은 환자들이 태반이다. 함께 모여 술을 먹다가 주먹다짐도 많고, 북적거리는 장소에서 시비가 붙어 오는 사람들도 있다.
이 많은 환자들을 하나씩 보고 있노라면 사람 파도가 언제나 다 끝나려나 싶은 생각이 든다. 명절 때 응급실 근무를 해 내면 다음 날엔 내 몸이 아파진다. 그만큼 명절은 의사에게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은 날이다.
하지만 올해 응급구역의 모습은 예전과는 좀 다른 양상일듯싶다. 사회적 거리 두기를 정부 차원에서 권장하고 있고 심지어 고향집 방문도 자제하는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아찔하다.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명절 때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피할 수 없고, 거기에 코로나 전파까지 더하면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다. 올해가 그런 명절 기간은 아니기를 바란다.
외래를 주로 보는 의사 입장에서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다. 이번 명절을 앞두고 내가 보는 만성질환 환자들에게 "추석 명절 잘 보내세요" 인사와 함께 "명절 음식 조심하세요!"도 덧붙였다. 추석 연휴가 지나면 갖고 있는 당뇨 등 지병이 나빠질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
(* 상계백병원 당뇨병센터에 따르면 2016년 추석 기준으로 당뇨악화가 확연히 진행되었다. 공복혈당은 129mg/dL에서 145mg/dL로, 식후 혈당은 210mg/dL에서 217mg/dL로, 당화혈색소는 6.76%에서 7.41%로 무려 0.65%나 증가했다.)
어디 당뇨뿐인가. 그에게는 고혈압, 고지혈증이라는 답 없는 형제들도 있다. 설탕 가득한 약과로 혈당을 하늘 끝까지 올린 후, 기름진 부침개로 위장을 한 번 쓸어주면 중성지방이 혈관의 새 지배자가 된다. 추석 이후 고지혈증 피검사를 계획한 내 환자들은 조금 시간을 두고 기다렸다 측정하고 싶을 정도다. 그들의 정신건강을 위해서다. 충격이 작지 않을 것이라 본다.
그런데 과거 내 임상경험에 비추어 본 이 모든 생각들이 모두 틀릴 수도 있겠다. 코로나 팬데믹 때문이다.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역병의 시대를 살고 있다. 불확실성은 예측하지 못한 사건을 낳는다. 그 일들이 의학적으로 많은 불행을 야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한 평범한 의사로서 이번 명절 기간이 부디 무탈히 잘 지나가길 기도해 본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인-잇 #인잇 #글쓰는의사 #양성우
# 본 글과 함께 읽어볼 '인-잇', 지금 만나보세요.
[인-잇] 환자들에게, 먼저 의사로서 미안합니다
▶ [마부작침] 아무나 모르는 의원님의 '골목식당'
▶ [뉴스속보] 코로나19 재확산 현황
▶ 더 깊은 인물 이야기 '그, 사람'
※ ⓒ SBS & SBS Digital News Lab. : 무단복제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