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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교회 김경진 목사 "부활신앙은 희망 주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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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소망교회 김경진 담임목사/소망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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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태로 정상적인 종교활동이 멈춰선 지 한달 반이 되어간다. 고난의 시기를 이겨낼 정신적 위로와 격려의 말씀에 대한 간절함도 깊어지고 있다. 12일 서울 소망교회 부활절 온라인 예배에서 김경진 담임목사가 ‘우리는 어떻게 부활에 참여하는가’라는 주제로 전한 설교 전문(全文)을 소개한다. <편집자>

우리는 어떻게 부활에 참여하는가?
롬 6:3-9

소망교회 김경진 담임목사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말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이 선언이 어떤 이에게는 공허한 말이고 어떤 이에게는 황당한 이야기이며 어떤 이에게는 미련한 정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선언은 복음이며, 지혜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에게 이 말은 감탄이며, 환호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들이 예배드리러 모일 때마다 이렇게 서로를 격려하곤 하였습니다. 지금도 이 인사는 동방교회를 비롯한 여러 교회의 부활절 전통에 남아있습니다. 박해를 받던 시절, 카타콤의 지하공동묘지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도 이들은 이 인사를 제일 먼저 나누었습니다. 주검들이 널려 있는 묘지 안에서 그들이 자랑스럽게, 그리고 힘차게 외쳤던 말이 바로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라는 인사였습니다.
부활의 신앙이 있었기에 그들은 당당히 박해에 맞설 수 있었고 환란과 핍박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부활의 신앙은 기독교인들이 믿고 따르는 가장 중요한 신앙의 내용이며, 교리입니다.

<부활신앙이 복음이다>
사도바울은 이 부활 신앙을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을 일깨워 드립니다. 여러분은 그 복음을 전해 받았으며, 또한 그 안에 서 있습니다.” (고전 15:1 새번역)
“나도 전해 받은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는 것과,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다음에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고전 15:3-5 새번역)

복음이란 무엇인가? 사도바울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째서 이것이 복음이 될 수 있는가?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잠든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고전 15:17-18, 20, 22 새번역)

<부활, 죽을 운명에 대한 유일한 희망>
첫째로, 부활 소식이 복음인 이유는 부활이 죽은 사람들, 죽을 사람들, 또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던져진 유일한 희망의 빛줄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죽음 후에 우리는 다시 살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알고 싶어 했고, 해결하고 싶어 했던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온전하게 풀어낸 이는 없습니다. 세상은 죽음을 그저 자연스런 일로 받아들이라고 권면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정복하셨다고 말합니다.

사망은 늘 모든 인간의 마지막 마침표이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저 어쩔 수 없이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죽은 예수를 무덤에서 다시 살려 내시고, 일으켜 세워 주셨으며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사망이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생명이 죽음을 삼키는 기적, 이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마지막은 죽음이 아니라 ‘부활’이며 ‘생명’이 됩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 이제 더 이상 죽음은 힘이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5)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를 믿는 모든 이에게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진실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 세상의 힘과 질서에 대한 도전>
두번째로 부활 신앙이 복음인 이유는, 이 부활사건이 이 세상에서 권력에 유린당하는 이들, 빼앗기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모든 이들에게 소망을 주는 단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부활의 복음은 죽음이 생명에게 먹히는, 세상질서가 역전되는 소식입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던 죽음이 생명에게 삼키어지고, 하나님의 힘이 죽음을 넘어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 역전의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타락한 세상의 힘과 질서를 거스르는 도전이며 이를 응징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질서가 아닌 새로운 질서가 세워졌음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권력의 남용과 군중들의 무지와 종교인들의 이기심과 탐욕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질서에 무릎 꿇지 않았고, 힘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역사상 권력의 남용으로 희생당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무지한 이들에게 살해당하고, 모욕당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경제적·정치적·문화적 이유로, 또 자신과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습니까?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세상 질서 속에서 때로는 억울함을 당하고, 때로는 괴로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여전히 어떤 이들은 악의 세력에 힘없이 무너집니다. 어떤 이들은 두려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감쪽같이 살해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러한 악한 세상의 질서와 사탄의 세력이 결국 성공하지 못함을 증명하는 사건입니다. 부활은 이런 잘못된 것, 정의롭지 못한 것들이 마지막에는 부끄럽게 드러나고 심판받을 것임을 선포하는 사건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악한 세상이 사람들을 아무리 억울하게 죽여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 내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살려 내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의지를 드러낸 사건입니다.

그래서 부활 신앙은 역경을 감수하는 신앙이고, 역전을 기대하는 신앙입니다. 부활 신앙은 고통의 시간에도 절망하지 않는 신앙이며, 억울한 순간에도 괴로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부활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합니다.

<어떻게 부활에 참여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 부활의 복음을 어떻게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단지 부활이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고, 이런 가치가 있다고 알고 있기만 하면 되는 걸까요?

사실, 이천여 년의 역사를 거쳐 오면서 기독교 신앙이 부활의 신앙이라는 것을 세상 사람들도 알고 있습니다. 때로는 기독교인들보다도 비기독교인들이 부활의 의미를 더 명료하고 설득력 있게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부활의 복음을 사회운동이나 여러 삶의 원리에 적용하며 마치 지혜를 얻듯이 살아가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과연 부활의 소식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그래서 복음(福音)이지요.

그러나 부활 소식은 우리에게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부활 소식이 단지 정보에만 머물게 된다면, 이것은 내가 죽어도 예수님처럼 다시 살 수 있으리라는, 운명에 대한 막연한 안전장치 정도에 불과할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역전을 기대하며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도록 격려하는 인생의 지침 정도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부활의 복음을 정말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부활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부활신앙과 세례>
교회 전통에서 부활절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예식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세례식입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교회는 부활절마다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부활절을 기념하기 위한 방식으로써 세례를 행했습니다. 개신교회는 그 전통을 많이 잃어 버렸습니다만, 예전적인 전통에서는 부활절과 세례를 뗄 수 없는 관계로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신앙과 세례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먼저 오늘의 본문 말씀을 다시 살펴봅니다. 로마서 6장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롬 6:4-5)

바울사도는 세례를,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다시 부활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의 부활절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날은 일 년에 한번 가장 귀한 세례의 날이었습니다.

3세기경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에 따르면 세례를 받으려는 사람은 3년 전부터 준비하는 단계에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에 이들 중에서 이번에 세례 받을 사람을 선별했습니다. 선별된 이들은 40일 동안 다시 절제하면서 훈련을 받다가 고난주간에는 금식을 하고, 마지막 3일간은 모든 성도들이 함께 금식을 하면서 세례식을 기다렸습니다.

부활절 새벽이 되면 세례 받는 이들은 옷을 벗고 물이 머리까지 차는 세례탕(Baptistry)을 향해 내려가게 됩니다. 완전히 잠길 때까지 내려갑니다. 완전히 물속에 잠겼을 때, “내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라는 말씀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다시 세례탕을 걸어 나오게 됩니다. 이때 세례자는 죄에 대하여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죽음을 미리 맛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실 속에서 새로운 존재로 태어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세례 받는 사람들은 차고 있던 모든 보석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물로 들어갑니다. 완전히 물에 들어갔다가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물위로 올라옵니다. 그러고 나면 그에게 세례명이 주어지고, 흰옷이 입혀지며, 젖과 꿀이 공급됩니다. 세례를 통해서 새로운 존재의 탄생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초대교인들에게 부활절은 단순히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회상하거나 기억하는 날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부활절마다 세례식을 통해서 자신이 죽고,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는 경험에 참여했습니다. 이렇듯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은, 부활을 축하하거나, 부활절 헌금을 내거나, 미래의 죽음을 생각하며 부활할 것을 믿고 감사하는 행위 이상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진정 기뻐하고 그 부활을 축하하려는 사람은,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서 옛사람을 죽이고, 예수와 함께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야 합니다.

<부활 신앙,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남>
부활신앙은 미래의 한 꼭짓점에 있을 그 종말적 사건을 생각하고 그 날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이곳에서부터 새로운 존재로, 희망을 주는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을 닮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란 바로 이 새로운 부활의 다른 말입니다. 우리의 부활절이 일반적으로 너무 내세지향적이고 개인적인 관점에서 지켜져 온 것이 아닌가, 그저 나의 죽음 이후를 보장하고, 우리 가족들의 죽음에 위안을 주는 절기로 역할해온 것은 아닐까 하고 반성을 해봅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로마서 6장의 말씀을 통하여서 진정 우리가 가져야 할 부활의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먼 미래의 그날의 부활, 나의 죽음 이후에 있을 부활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다시 오늘 살아나는,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나의 옛 자아를 죽이고 거듭 나는, 바로 그것이 진정한 부활 신앙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부활을 원래 모습 그대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 사용합니다. 운동선수가 부활했다고 말하면, 운동선수가 다시 자신의 기량을 회복하였다는 말입니다. 회춘을 하거나, 다시 젊어지거나, 못하던 것을 다시 하게 되는 것, 전성기로의 복귀 정도를 뜻하지요.
하지만, 믿는 이들이 사용하는 부활의 의미는 완전히 다릅니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 죄악되고 타락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육적인 모습, 자신의 죄 된 자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로운 자아,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인격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우리는 어떻게 부활에 참여하는가?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부활을 기억하고 생각하는 데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나의 존재를 의의 도구로, 나의 성품을 주님의 성품으로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부활의 아침,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을 들으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롬 6:13 새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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