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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18 (화)

[한겨레 프리즘] 탄력근로제가 민생법안? / 이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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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지혜

한겨레 정치팀 기자



개인적으로 정치팀 기자로 일하면서 정부 여당이 가장 야속한 순간은 꼭 처리해야 할 민생법안으로 ‘탄력적 근로시간제(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를 꼽을 때다. 지난해 2월27일 노동 분야를 취재하는 신출내기 언론노동자로서 주 52시간제 입법을 지켜본 기억이 아직 생생한 탓이다. 잃은 것도 얻은 것도 있는 법 개정이었지만, 내게는 ‘사회는 느리게라도 진보한다’는 기대를 품게 된 날이었다. 하지만 요즘 정부 여당의 반복된 탄력근로제 확대 주장을 들으면 과거의 내가 너무 순진하게 느껴져 얼굴이 홧홧하다.

지난 8일 문재인 대통령은 주 52시간제 보완이 필요하다며 또 탄력근로제를 화두에 올렸다. 자유한국당과 의견차가 커 논의는 멈춘 상태지만 더불어민주당은 탄력근로제 확대를 주요 입법과제에서 빼는 법이 없다. 당·청의 주장은 큰데 이게 왜 필요한지 설명하는 이는 찾기 어렵다.

민주당의 방패는 ‘노사 합의’다. 민주당 의원들에게 왜 탄력근로제를 확대해야 하느냐 물으면 지난 2월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에서 나온 ‘탄력근로제 6개월 확대 합의’를 근거로 댄다. 하지만 그 합의가 국회의 주문으로 시작된 점을 고려하면 이처럼 무책임한 대답은 없다. 당시 정부는 주 52시간제 시행과 함께 ‘기업 달래기용’ 탄력근로제 확대 계획을 밝혔고, 국회는 경사노위에 탄력근로제 확대를 논의하라며 시한까지 박아 사회적 대화를 발주했다. 합의에 나섰던 한국노총도 “이미 단위기간 확대로 방향이 정해진 상황에서 오남용이라도 막으려는 전략적 합의였다”고 소회를 털어놨다.

그럼 탄력근로제 확대 필요성은 누가 검증한 걸까? 아무리 회의록을 뒤져봐도 국회는 논의조차 안 했다. ‘노동자의 삶의 질 향상’이라는 대의는 사라진 채 정치권과 경영계 사이 ‘주고받기’만 남은 지금, 탄력근로제가 정녕 주 52시간제 부작용을 줄일 보완책이 맞는지 궁금해하는 이는 하나도 없다.

지난해 12월 발표된 한국노동연구원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탄력근로제는 인기가 없는 제도다. 탄력근로제 도입 비율은 3.22%, 앞으로 도입 계획이 있는 기업은 3.81%다. 단위기간 확대를 바라는 비율도 3.5%뿐이다. 탄력근로제는 법정 노동시간을 어떻게 나누어 쓸지 정하는 제도이지 총 노동시간을 늘려주는 ‘치트키’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하는 방식의 혁신 없이, 추가 고용 없이, 탄력근로제만으로 기업이 노동시간 단축에 대응할 수 있다고 믿는 건 환상이다.

탄력근로제 확대는 기업들의 주 52시간제 적응에는 별 도움이 안 되지만, 노조 없는 노동자에게는 큰 짐이다. 실제로 취재를 나가보면 노조 없는 회사에서 사장이 “탄력근로제가 있어서 노동시간 단축 안 해도 된다”고 노동자들을 속이는 사례만 줄줄이 만난다. 노조 조직률은 고작 10%, 근로감독 역량도 떨어지는 상황에서 탄력근로제 확대는 현장에 잘못된 사인을 주고 음성화된 장시간 노동만 부추길 수 있다. 주 52시간제를 주도한 정부 여당이 앞장서 노동시간 단축의 중요성을 깎아내리는 꼴이다.

지금 정치권이 주 52시간제 보완책으로 탄력근로제를 외치는 건 근거 없는 허상에 불과하다. 민주당과 한국당은 각각 단위기간 6개월과 1년을 주장하며 서로 “내가 이렇게나 기업을 아낀다”고 우기는 의미 없는 싸움을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이 한가한 줄다리기를 벌이기에는 한국의 세계 최장시간 노동 현실은 무서울 만큼 심각하다.

내년 1월1일부터 주 52시간제가 도입되는 50~300인 사업장은 5곳 가운데 1곳꼴로 장시간 노동 문제를 겪는데다 인원 충원 여력도 부족하다. 대기업으로 분류되는 300인 이상 사업장의 불만이 엄살이었다면, 50인 이상 사업장의 불만은 벼랑 끝 현실이다. 지금이라도 정치권이 진지한 토론에 나서지 않는다면, 1866년부터 오랜 국제노동운동의 강령이었던 ‘하루 8시간 노동’은 150년을 건너 한국에서 공허한 구호로 전락하고 말 테다.

god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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