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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순응하는 교육에 미래는 없다 [김상균의 메타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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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30일 앞둔 지난해 10월17일 서울 시내 한 고등학교에서 고3 학생들이 자율 학습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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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균 | 인지과학자·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



학교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교과서대로 해서, 부모님이 짜준 일정표대로 학원에 열심히 다녀서, 이 뒤에 어떤 말이 따라오면 적절할까? 명문대에 입학한 학생들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하는 인터뷰가 떠오른다. 그래서 입시라는 관문을 넘었다는 뻔한 이야기 말이다.



그들은 사회가 정한 기준을 잘 맞춰냈다. 다른 친구들보다 좀 더 잘 맞춰냈기에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렇다면 그들이 큰 성취를 이뤘다고 볼 수 있을까? 섭섭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취란 뾰족한 목표를 이룬 것에 어울리는 표현인데, 그들이 명문대, 특정 학과에 입학했다고 해서 뾰족한 목표를 이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입시 과정은 전반적인 기준에 두루두루 맞는 학생을 가려내는 경쟁이다. 모든 과목에서 일정 수준을 맞추고, 사고도 안 쳤어야 한다. 그런 기준에 자신을 잘 맞춘 이들이 입시라는 관문을 지나간다. 자신이 그 기준에 공감하건 말건, 그 기준이 타당하건 아니건 간에 그 기준에 순응하는 이들이면 최대한 순응하면 된다. 그들의 노력을 깎아내리려는 뜻은 아니지만 그것은 성취가 아니다. 그저 지독한 순응의 결과이다.



학원가에서 밤 10시에 집으로 향하는 아이를 붙잡고 묻겠다. 네가 하는 국영수 공부가 정말 의미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그 긴 지문을 훑어보고 2분 만에 답을 찾아내는 훈련을 통해 너는 세상을 더 잘 이해하게 됐느냐고, 너는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으냐고, 실제 내 조카에게 했던 질문이다. 그 아이의 얼굴에 억지 미소, 멍한 표정이 섞인 듯했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그 한숨은 다른 방법이 없는데 왜 그러느냐는 항변 같았다. 내게 따져 묻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그저 무기력하게 피하듯 순응하는 모습이었다.



성취가 아닌 순응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대학에 가고 직장에 가서도 자신이 무엇에 순응할지 그 대상을 찾는다. 자신만의 뾰족함을 발견하고 담대하게 나아가지 못한다. 인공지능이 변호사 시험, 회계사 시험, 대학 입학시험을 통과했다는 식의 보도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인공지능은 시험에 어떤 목적, 가치가 있는지 모른다. 그저 인간이 제시한 글 뭉치들을 다 집어삼키고는 인간의 기준에 순응해서 결과를 뽑아낼 뿐이다. 순응이란 면에서 인공지능은 인간을 이미 압도했다. 아직 인공지능은 몸이 없고 인간처럼 사회생활을 못 하니 별문제가 아니라고 위안하면 될까? 중국은 소형차 한 대 값의 인공지능 로봇을 출시하는 단계에 도달했다. 독일, 한국의 자동차 기업들은 생산 현장에 인공지능 로봇을 점차 투입한다는 계획이다.



유감스럽지만 오늘의 공부, 순응하는 인간을 배출하는 교육에 미래는 없다. 인공지능 기계와 경쟁하는 인간, 인공지능 기계에 밀려나는 인간을 양산할 뿐이다. 우리 아이들은 기존 기준에 순응하지 않고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정해진 길만을 인내하며 걸어가는 존재가 아니라, 삶을 온전히 탐험하고 즐기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고유 가치를 발견하고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고유 가치와 정체성을 품을 때 그 어떤 인공지능 기계와도 견줄 수 없게 반짝이는 존재가 되리라 믿는다. 인공지능 시대, 미래 교육은 그런 존재를 키워낼 수 있어야 한다. 인공지능이라는 도구를 발판 삼아서 우리 아이들이 그런 존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우리가 나서야 한다. 이것이 인공지능 시대를 향하는 교육의 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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