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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9 (토)

어떤 자유주의자의 자기 착취에 관한 고백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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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충북 제천시 덕산면 제천간디학교 입구에서 바라본 학교 전경.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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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곤 | 제천간디학교 교장·건신대학원대 대안교육학과 교수



올 것이 왔다. 공황장애. 처음 겪는 일이다. 예고 없이 공포감이 밀려든다. 일순간 가슴이 막히고 숨이 조여온다. 두려움에 대해 생각할 겨를만 줘도 좋겠다. 하지만 공황장애는 그런 아량을 베풀지 않는다.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기습 공략할 뿐이다. 그럴 만도 했다. 주변에서 내게 걱정스러운 눈길을 던질 때 이런 너스레를 떨었다. “만성 피로를 새로운 과로로 덮고 살죠, 뭐.” “어차피 죽으면 썩을 몸, 아껴서 뭐 하리.” 이러면서 주말도 가리지 않고 일에 매달렸다. 응분의 벌을 받은 거다.



철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읽었다. 전문가가 내게 혼쭐내는 것 같았다. 현대사회는 사람을 ‘긍정성 폭력’에 시달리도록 한단다. 박탈보다는 포화, 배제보다는 고갈 작전을 펼친다. 당하는 이는 적대감을 가질 수 없다. 그것이 폭력인지도 알아차리기 힘든 탓이다. 한병철은 소진증후군도 콕 집어 언급했다. 그것은 긍정성이 넘쳐날 때 일어나는 징후란다. 다른 말로 ‘자아가 동질적인 것의 과다로 타버리는 것’이라 했다. 여기서 ‘동질적인 것’이란 무엇일까? 지금 이 시대는 규율이 중요했던 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넘어왔다. “금지, 명령, 법률이 차지하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더 많은 성과를 내야 한다는 의식이 누구에게나 균질하게 팽배한 사회. 바로 그 현상을 ‘동질적인 것의 과잉’으로 해석한 모양이다.



그럼 내게 약간이라도 면죄부를 줘야 하는 게 아닐까? 나 혼자 돈 많이 벌어서 잘살아 보자며 이렇게 발버둥 친 것은 아니잖나. 내 과로에는 최소한의 ‘공익적 요소’가 있노라 항변하고 싶었다. 억하심정을 누른 채 계속 읽어나갔다. 그러다 결국 다음 구절에서 마음이 무너졌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다른 이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한병철은 더 나아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착취하는 것보다 더 효율적이다.” 성과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마음의 병은 이 같은 ‘역설적 자유’가 병리 현상으로 드러난 것이라 규정했다.



자유주의 성향이 있는 허무주의자. 나는 오래전부터 자신을 이렇게 바라보았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되 결과나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나. 얼마나 멋진가. 하지만 이같이 어설픈 자유주의 기질이 결국 내 몸과 영혼을 무리하게 갉아먹은 셈이다. 핑계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해마다 다가오는 제천간디학교 신입생 모집. 정원 미달이란 상상하기 싫다. 만약 그런 사태를 맞이하면 학교의 정체성과 근간이 흔들린다. 예비 입학생 부모 연령대가 모인 단체에서 강연 요청이 오면 거부하지 못했다. 전국 어디든 불려 나갔다. 신문 연재 칼럼. 내가 가진 의식 수준보다 다섯배는 더 낫게 잘 쓰고 싶다.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늘 무리해서 마감한다. 대학원 강의. 대안교육학과라는 이름에 걸맞도록 참신한 접근과 지적 자극이 넘쳐나는 수업을 이끌고 싶다.



잘하고 싶은 욕망의 리스트는 줄줄이 이어진다. 아, 내가 방금, ‘욕망’이라 했던가? 앞서 방패막이로 세웠던 ‘공익적 요소’는 다 어디로 갔지? 능력 있는 교육실천가, 혹은 매력적인 교육연구자 이미지 속에 감춰둔 내 과도한 인정욕구가 결국 나를 착취한 범인이었다. ‘나는 영업 실적을 내서 자기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회사원이 아니다.’ 마음속으로 이러면서 빠져나갈 구석을 찾았다. 곱씹어보니 내가 ‘어떤 대의를 위해’ 나를 남용하는가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었다. 나를 조금 덜 유능한 사람으로 놓아둔 채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더 중요했다. 어쩌면 공황장애는 내 거대한 착각과 욕망에 균열을 내고, 자신을 돌아보라 조언하기 위해 불쑥 찾아들었는지 모른다.



학교라는 제도를 생각해본다. 그곳은 여전히 규율사회이면서 성과사회이기도 하다. 학생들은 네모 상자 교실에서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자신을 소진한다. “아이들 25% 정도는 신경정신과, 또는 정서 행동장애 관련 약을 먹고 있다”는 초등 교사들 증언이 떠오른다. 탈출구는 하나다. ‘느긋하게 최선을 다하자’는 정도 제안으로는 모자라다. 당분간 일이나 학습노동에 손대지 않는 것이 근본 해결책이다. 그게 정책 구현으로 가능할까? 잘 모르겠다.



우선은 당장 나부터라도 숨을 좀 쉬어야겠다. 불청객으로 다가온 이 공황장애 사태가 훗날 썩 괜찮은 후일담 소재로 남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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