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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3 (일)

[장경덕 칼럼] 분절된 세계의 생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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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중국과 무역전쟁을 벌이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국가경제위원장을 맡고 있던 게리 콘은 이렇게 말한다. "중국이 정말로 우리를 망하게 하려면 그냥 항생제 수출을 끊어버리면 됩니다." 그는 페니실린을 비롯해 주요 항생제 아홉 가지가 미국에서 생산되지 않는다는 자료를 내밀었다. 그리고 미국의 아기들이 패혈성 인두염으로 죽어가면 엄마들에게 뭐라고 하겠느냐고 물었다. (밥 우드워드의 '공포')

단 세 가지 화학 소재로 한국 주력산업의 목줄을 죄려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노림수를 보며 게리 콘의 이야기가 다시 생각났다. 지금 같은 글로벌 분업 체제에서 주요 교역국들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상대에 큰 고통을 안겨줄 수 있다.

중국이 항생제 수출을 끊더라도 미국 제약사들은 바로 수입 대체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축적의 시간이 필요한 일본의 기술 제품 수입이 끊기면 우리는 당장 어찌할 도리가 없다. 아베의 기습은 그래서 더 치명적이다. 차세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로 치고 나가야 할 한국에는 존재론적 위협을 가하는 것이다.

세계화의 황금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다. 자유무역의 수호자였던 미국이 어느 나라보다 앞장서서 보호무역의 기치를 올리는 시대다. 트럼프가 늘 '국가 안보'를 핑계로 보호무역 장벽을 쌓듯 아베도 같은 이유를 내세워 한국을 때리고 있다.

한국은 자유무역 체제의 최대 수혜자였다. 그만큼 지금처럼 분절된 세계에서 한국이 받을 충격도 클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와 문재인정부가 출범한 2년 전만 해도 글로벌 교역 증가율은 5%대 중반이었다. 올해는 2%에 턱걸이라도 할 수 있을까. 길고 가늘고 촘촘하게 연결됐던 글로벌 공급망은 뚝뚝 끊어지고 있다. 지난날에는 주로 자연재해 때문에 그렇게 됐다. 지금은 정치적 문제로 글로벌 가치사슬이 망가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 영국과 유럽, 한국과 일본 사이의 단층은 쉽게 메울 수 없을 것이다.

아베 정부는 위안부 합의 파기와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따른 신뢰 훼손을 들어 경제보복에 나섰다. 그 단초가 무엇이든 한일 경제전쟁의 요체는 기술의 무기화라고 봐야 한다. 국교 정상화 이후 반세기 남짓한 기간 중 한국은 일본에 6000억달러(700조원) 넘는 무역적자를 냈다. 트럼프가 수입관세를 무기로 중국을 압박할 수 있는 건 중국의 대미 수출이 수입보다 네 배나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은 엄청난 대일 적자를 내면서도 부품소재 기술이 달리기 때문에 급소를 맞고 있다. 틈새 기술에서 한 우물을 판 일본의 중강기업들은 반도체 자동차를 비롯한 한국 주력산업을 인질로 잡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분절된 세계에서 살아남는 법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먼저 글로벌 기술 패권 전쟁의 비정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한일 간에는 기술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100년 전쟁이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 아베의 기습은 대격변의 신호탄이다. 구한말의 국채보상운동이나 환란 때의 금모으기 때와 같은 심정으로 내부 결속을 다지는 것보다 더 절박한 것이 있다. 기술 수출 규제와 더불어 한국 기업의 돈줄을 죄는 금융 압박, 한국은 믿을 수 없는 나라라는 외교전의 파상공세를 넘는 일이다. 게임 체인저가 되기 위한 전략의 큰 줄거리는 두 가지다. 한·중·일 협력 구도를 깨트리지 않고 심화시킬 대외 전략과 우리 스스로 유연하고 민첩하게 변화와 혁신을 이끌어갈 대내 전략이 그것이다.

지구촌 어느 곳보다 많은 인구와 도시가 밀집된 한·중·일은 가장 역동적인 경제공동체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일본의 소재, 한국의 중간재, 중국의 조립산업이 촘촘히 연결된 공급망이 어느 한 나라의 정치적 변덕으로 끊어지지 않도록 보장하는 새로운 협력 체제를 제안하고 만들어가야 한다. 과거사 문제는 가장 실용적인 외교로 해법을 찾아가야 한다. 우리는 도덕적 우위를 잃지 않으면서도 유연하게 타협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가 경제를 무기화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확립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안으로는 한국 경제의 발전모델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글로벌 공급망의 단절에 따른 리스크를 분산하는 게 중요하다. 첨단 부품소재 개발은 속도전이 필요하다. 주 52시간근무제 같은 규제로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 경제전쟁의 시대에 막연한 희망적 사고로 자위하는 것은 주술이다. 어떤 무도한 공격도 막아낼 수 있는 것은 결국 기술경쟁력이다. 분절된 세계에서 마지막까지 우리를 지켜주는 것은 주술이 아니라 기술이다.

[장경덕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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