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지난달 30일 귀국 비행기서 기자들에 '완전한 핵 동결' 추진 입장 밝혀
"완전한 WMD 동결 대가로 인도 지원, 관계개선 줄 수 있어"
비건 "비핵화 전까지 제재 완화 없다"지만 동결 대상 협상서 北 '제재 완화' 요구할 듯
美와 핵실험 중단 합의 뒤 사실상의 핵보유국 된 파키스탄 전례될 가능성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판문점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회동한 후 미국이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 1차 목표를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포함하는 '대량살상무기(WMD) 동결(凍結)''로 설정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미국이 본격적인 실무 협상을 앞두고 애초 설정한 ‘빅딜(일괄타결)’론에서 한 발 물러난 것 아니냐는 것이다. 미국은 공식적으론 '완전한 비핵화가 달성될 때까지 대북 제재 해제는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런 입장이 견고하게 유지된다면 완전한 비핵화로 가는 과정에서 동결을 1차 목표로 삼는 것이 현실적인 협상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再選)에 나서는 내년 대선 전까지 '완전한 비핵화'를 실현하는 건 어렵다고 보고 사실상 '핵 동결' 선에서 핵 협상을 마무리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美서 잇따르는 '핵 동결' 보도
이런 관측은 지난달 30일 미 뉴욕 타임스(NYT) 보도로 촉발됐다. NYT는 '새로운 협상에서 미국이 북핵 동결에 만족할 수도 있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번 미·북 판문점 회동이 있기 몇 주 전부터 트럼프 행정부 내에선 미·북 협상의 새로운 기반이 될 수 있는 '진짜 아이디어'(real idea)가 구체화됐다고 보도했다. NYT는 이 아이디어의 개념이 '핵 동결', 즉 핵물질과 핵무기를 더이상 생산하진 않지만, 현재 보유한 핵무기의 보유는 암묵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이라고 전했다.
NYT는 트럼프 행정부가 공식적으론 완전한 비핵화를 목표로 제시하고 있지만 북한에 핵 프로그램에 대한 '항복'을 요구하는 것이 가까운 시간 내에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새로운 접근법을 저울질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NYT는 "이런 방안은 북한의 핵무기 증대를 막을 수는 있지만, 가까운 미래에 20∼60개로 추산되는 현존하는 무기를 폐기하지 못한다"면서 "북한의 미사일 능력도 제한하지 못한다"고 했다.
NYT는 또 "미 정부 관리들이 상당한 수준의 대북 인도적 지원을 허용하거나 문재인 대통령의 남북 평화 프로세스에 따른 제한된 남북 경협 허용 등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미국과 북한이 상대국 수도에 이익 대표부(interests offices)를 교환 개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입에서도 '완전한 동결'이란 말이 나왔다. 그는 지난달 30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을 수행한 뒤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비보도를 전제로 브리핑을 했다. 비건은 이 브리핑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대량파괴무기(WMD)의 완전한 동결(complete freeze of WMD programs)"이라고 말했다고 미 인터넷매체 악시오스가 2일(현지시각) 보도했다. 비건 대표는 또 미 정부는 동결과 비핵화 엔드스테이트(end state·최종 상태)에 대한 개념을 정확히 규정하기 원하며, 북한의 비핵화 로드맵에 대해 협의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이와 함께 북한이 비핵화할 때까지 대북 제재는 유지하되, 그 사이 인도적 지원이나 연락사무소 설치와 같은 외교 관계 강화 등의 대가를 제공할 수 있다고 했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미·북 판문점 회동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평양 주재 미 연락사무소(liaison doofice) 개설을 제안했던 것을 알려졌다.
◇美 '핵·WMD 동결'과 '인도적 지원·연락사무소 교환' 카드 꺼낸 듯
뉴욕타임스와 악시오스의 보도 등을 종합해보면 미 행정부가 완전한 비핵화 이전 단계로 핵·WMD 동결을 받는 대가로 인도적 지원과 인적 대화 확대, 상대국 수도에 외교 채널 설치 등을 내줄 생각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그동안 북한 내 모든 핵시설 폐기라는 일괄타결식 접근법을 고수해왔다. 반면 북한은 '동결-감축-폐기'라는 3단계 방안을 제시해왔다. 이런 점에서 미국이 '완전한 동결'을 들고 나온 것은 북한의 단계적 접근법을 일부 수용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번에 비건 대표가 미 언론에 밝힌 방안은 지난 2012년 미국과 북한 간 타결한 '2·29 베이징 합의'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미·북은 당시 영변 우라늄 농축 활동 중단(모라토리엄) 및 이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 IAEA) 사찰을 수용하고, 이에 대한 대가로 24만톤의 영양 지원을 제공하기로 합의했었다. 양측은 또 문화・교육・스포츠 분야 등에서 인적 교류를 증대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아울러 미측은 대북 제재 조치가 북한 주민의 일상 생활에 대한 제재를 목표로 하는 게 아니라고 밝혔다. 북이 지난 2월 하노이 회담에서 영변 핵시설 폐기와 민간 분야 대북 제재 해제를 교환하자고 제안한 것도 2·29 합의에 근거를 둔 것으로 보인다.
비건 대표의 협상안이 2·29 합의와 차이가 있다면 모라토리엄 대상으로 '영변 핵시설'을 '비밀 핵시설을 포함한 북한 전역의 핵 생산 시설'로 확대하고, '대북제재 완화' 부분은 제외하겠단 걸로 해석된다. 이에 대해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핵 협상을 할때 가장 먼저 해야하는 것은 운동장을 평평하게 하는 것"이라면서 "협상하는 과정에서 먼저 동결을 하고, 대신 인도적 지원이나 관계 개선을 하겠다는 것은 일정 수준 인정할 만한 조치"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같은 미국의 제안을 북한이 수용하느냐다. 북한은 겉으로는 '제재 해제에 목매지 않겠다'고 하고 있다. 김정은은 지난 4월 12일 시정연설에서 "제재 해제 문제 때문에 목이 말라 미국과의 수뇌회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서 "미국이 지금의 계산법을 접고 새로운 계산법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서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를 토대로 일각에선 북이 '핵 동결'과 '관계 정상화'를 맞바꾸는 협상안을 수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2019년 6월 30일 판문점 자유의 집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악수하고 있다. 두 사람은 이날 당초 예상을 깨고 53분간 만남을 가졌다. 지난 2월 하노이 회담이 결렬된 이후 4개월 만에 사실상의 정상회담이 이뤄진 것으로 평가된다. /뉴시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동결 대상 협의 과정서 北 제재 완화 요구할 듯
관건은 '핵 동결' 범위다. 북한은 핵 동결 대상을 영변 지역으로만 한정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영변 외에 강선이나 박천 등 다른 비밀 시설도 포함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결국 미·북 양측이 동결 범위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북한이 '제재 해제', 최소한 '제재 완화'는 요구할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비건 대표가 제안한 '핵 동결'과 '인도적 지원 및 연락사무소 설치'를 교환하는 수준에서 타결이 이뤄진다면 문제될 게 없다"면서도 "과연 이것을 북한이 받을 지가 의문"이라고 했다. 북한이 협상 과정에서 제재 완화를 요구할 것이란 얘기다. 신 센터장은 "북이 핵 동결을 대가로 제재를 완화해줄 경우 향후 비핵화 과정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NYT 보도대로 트럼프 행정부가 핵 동결 협상 과정에서 남북 경제 협력 사업을 대북 제재 예외 대상으로 용인해주는 방안도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다. 문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트럼프 대통령이 비무장지대(DMZ) 오울렛 초소에서 개성공단을 가리키며 한반도 평화에 도움이 된다고 설명한 것도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개성공단 재개 카드를 활용하라고 '슬쩍 찔러본 것'일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금까지 추구해온 북한 비핵화 목표에서 아예 물러선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미국의 시사지 애틀랜틱은 지난 2일 논평을 통해 이번 회동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양측간 최대 현안인 '비핵화' 이슈가 거론되지 않은 점이라고 평가했다. 애틀랜틱은 비핵화 진전이 없는 가운데 성사된 '판문점 회동'을 '기세가 꺾인 야망의 산물'로 정의했다.
퍼시픽 포럼의 핵전문가 데이비드 산토로 연구원은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의 사진을 언급하며 "미국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북한이 미국과의 '핵 동결' 합의를 체결한 후, 합의 내용을 제대로 준수할지도 미지수다. 미국 'USA투데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핵 동결로 북한 비핵화의 목표를 낮출 가능성이 있다는 NYT의 보도를 인용하며 "북한은 핵 동결 약속마저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미·북 관계 개선된 후에도 '대북 제재' 여전히 유효할까
악시오스 보도에 따르면 비건 대표는 "비핵화 이전의 제재 완화에는 관심 없다"며 핵 동결로 인한 제재 해제나 완화 가능성에는 선을 그었다. 하지만 핵 동결 협상 과정에서 미·북 간에 연락사무소가 개설되는 등 관계 정상화가 일정 부분 진전될 경우에도 미국의 이런 원칙이 지켜질 수 있을지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핵 동결을 계기로 대북 제재가 일부 완화될 경우, 그물망식으로 구성된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망이 와해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완전한 비핵화는 이루지 못한 가운데 미·북 관계가 개선된 상황에서도 과연 대북 제재가 촘촘히 유지될 지 의문"이라며 "촘촘하게 만들어진 대북 제재망의 실이 한가닥 풀리면 전체적으로 흔들릴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남 교수는 "대북 제재망이 강하게 유지될 수 있는 강한 요인 중 하나가 바로 '대북제재망이 견고하다'는 심리적 안정감"이라면서 "'대북 제재가 풀렸다'는 시그널이 나오면 대북제재망은 금새 유명무실해질 것"이라고 했다.
미국이 대북 제재 해제나 완화를 공식화하지 않더라도 우회적인 방법으로 제재망을 약화할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감시 태세를 약화하거나 제재 위반 상황이 드러났을 때 후속 조치를 미온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범철 센터장은 "미·북 관계가 개선된 상황에서 미국이 대북 제재 경계를 지금처럼 강력하게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면서 "대북 제재 위반 상황에 대해 묵인하는 방식으로 대북 제재의 틈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이미 이 같은 '틈'을 이용해 사실상 핵보유국이 된 나라가 있다. 파키스탄이다. 미국은 1980년대 파키스탄과 추가적인 핵실험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핵보유를 간섭하지 않겠다고 합의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파키스탄의 전략적 가치가 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파키스탄은 접경국가인 인도가 1998년 핵실험을 하자, 자신들도 핵실험을 단행했다. 파키스탄은 이후 국제사회의 제재로 핵실험 동결을 선언했지만 몇 년 후 제재가 풀리면서 사실상 핵보유국이 됐다.
파키스탄은 현재 100개 이상의 핵미사일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파키스탄은 현재 핵확산방지조약(NPT) 미가입에 따른 국제사회의 제재도 받지 않고 있다. 외교가에선 북한이 파키스탄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중 갈등이 격화되고 동북아지역에서 북한의 전략적 가치가 커지면서 북한의 핵보유를 미국이 눈감아줄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핵 협상을 국내 정치용 카드로 활용하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이 1기 집권기엔 '핵 동결'이란 1차 목표점에 도달한 뒤, 재선 후 애초 목표였던 'FFVD'까지 추진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문제는 핵동결 합의를 비핵화 합의로 끌고갈 동력을 어디에서 확보하느냐이다. 신 센터장은 "미국이 핵 동결에서 완전한 비핵화로 북한을 끌고갈 모멘텀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북한은 파키스탄의 길을 그대로 걸을 것"이라면서 "사실상 핵보유국이 된 북한을 마주하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정부가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만 해선 안된다"면서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둔 '플랜 B'를 확실히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윤희훈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