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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 (월)

[뉴스AS] 임금 떼인 ‘염전노예’, 누굴 위한 소멸시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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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 장애인 강제노동 사건엔 소멸시효 없애자는 헌법소원

신안 염전노예 사건·충남 과자공장 사건 민법상 소멸시효 적용돼

“장애인에 ‘왜 진작 배상 청구 안 했냐’ 다그치는 꼴”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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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시민단체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헌법소원을 제기했습니다. 이들이 헌법소원을 통해 문제를 지적하는 법 조항은 민법 제162조1항과 166조1항입니다. 이 법 조항은 채권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때로부터 10년 동안 행사하지 않으면 그 소멸시효가 완성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관련 기사 : “‘염전노예' 착취 책임 묻는 데도 소멸시효?” 시민단체 헌법소원 청구)

이 단체는 이날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민법상 소멸시효 규정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이유를 “장애인의 노동력을 착취한 가해자의 배상 책임을 물을 수 없게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오랫동안 장애인을 감금하고 확대하면서 노동력을 착취한 여러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 가해자가 어김없이 소멸시효를 꺼내 손해배상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이 단체는 헌법소원 청구서에서 “소멸시효의 입법 취지는 1) 채권자의 권리 불이행 방지 2) 채무자의 이중변제 방지 3)법의 안정성이다. 그런데 장애인 학대사건은 장애인 본인이 자신이 제공하는 근로의 부당성을 인지하기 어렵다는 특수성이 있어, 소멸시효가 있다고 해도 권리 불이행이 방지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사실은 명백하기 때문에 이중변제 방지도 성립할 수 없다. 법의 안정성 목적이 남는데, 법의 안정성이 보호해야 할 것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그러면서 “이런 점 등을 고려했을 때 민법의 소멸시효를 장애인 학대사건에 그대로 적용하는 게 맞는지 의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문제점을 살펴보겠습니다. 지적장애인 박아무개씨는 2000년 1월 직업소개소를 통해 전남 신안군의 한 염전에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박씨는 이후 14년 동안 같은 염전에서 일을 해왔는데, 염전 소유주는 그동안 박씨에게 임금을 주지 않았습니다. 제공되는 것은 숙식뿐이었습니다. 소금을 미는 일인 ‘대파 작업’을 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소유주가 그의 뺨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공짜노동과 폭행, 감금에 시달리던 박씨는 2014년 1월이 되어서야 경찰에 구조됐습니다. 언론보도를 통해서도 잘 알려진 ‘신안 염전노예’ 사건입니다.

이 사건의 판결문을 보면, 박씨는 2001년 1월부터 꼬박 14년 동안 1억2천만원 상당의 노무를 제공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는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책정한 임금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해자인 염전 소유주는 민법상 소멸시효를 주장합니다. 이에 재판부는 가해자의 주장을 받아들여 박씨가 소장을 낸 2014년 8월을 기준 삼아 10년 전인 2004년 8월 이전의 임금은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박씨가 2000년 1월부터 2004년 8월까지 일한 임금 2172만여원을 빼고, 9999만여원의 배상 책임만 남게 됐다고 판단했습니다. 박씨는 억울하게 착취를 당하고도 소멸시효 때문에 임금의 최소 18% 정도를 돌려받지 못한 겁니다.

사례는 또 있습니다. 지적장애인 황아무개씨는 마찬가지로 지적장애를 가진 아들 최아무개씨와 함께 충남 당진의 한과 제조공장에서 15년 가까운 시간 동안 임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일했습니다. 공장주는 일을 못 한다는 이유로 빗자루로 최씨의 머리를 피가 나게 때렸습니다. 게다가 이들이 받아야 할 장애인 연금을 빼돌리기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황씨 모자는 2016년 10월 장애인인권침해예방센터 직원들에 의해 구출됐고, 이들의 피해 사실은 지난 17일 언론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공장주는 근로기준법 및 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 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돼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상태입니다.

판결문을 보면, 황씨는 2001년 9월부터, 최씨는 2002년 6월부터 2016년 10월까지 보통 주 6일, 1일 10시간씩 일했습니다. 도시일용노임을 기준으로 계산해보니, 황씨는 그동안 2억6571만여원, 최씨는 2억5821만여원 상당의 노무를 제공한 것으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 사건 역시 황씨 모자가 소장을 낸 2018년 1월을 기준 삼아 10년 전인 2008년 1월 이전의 임금은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황씨는 약 7년, 최씨는 약 6년 동안 일한 임금이 소멸시효 때문에 날아가게 된 겁니다. 게다가 이들의 지적장애에 따른 노동 생산능력 등을 감안해 재판부는 최종적으로 황씨 모자가 청구한 금액의 3분의1만 인정하는 판결을 내놨습니다. 재판부는 아울러 “장애인 노동력 착취 사건에서 소멸시효 주장은 위헌”이라는 위헌심판제청 신청도 각하했습니다.

이렇게 십년 이상 착취를 당한 장애인이 법원 판결 등을 통해 피해 사실을 인정받았음에도 임금을 온전히 변제받지 못하는 사건이 되풀이되면서, 장애인 노동착취 사건에서만큼은 민법상의 소멸시효 규정을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게 됐습니다. 소멸시효 규정은 모든 사건에 적용되는 것이지만, 그 특수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적어도 장애인 학대사건에 대해서는 이 규정의 입법 취지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번 헌법소원 청구의 대리인을 맡은 원곡 법률사무소의 최정규 변호사는 “‘20~30년 노동력을 착취해도 왜 가해자가 반환해야 할 임금 관련 부당이득은 10년으로 제한되는 것일까? 왜 나머지 부분은 소멸되었다고 해석되어야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갖고 이번 헌법소원을 내게 됐다”며 “지금의 소멸시효 규정을 장애인 학대사건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15년 가까이 감금되어 있다가 겨우 벗어나 이제야 소송을 내는 사람에게 ‘배상을 받고 싶었으면 소멸시효 10년이 지나기 전에 탈출해서 청구를 했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과 다름없다.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고 강조합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강제근로 피해의 소멸시효에 대한 국회 차원의 입법 논의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지난 2월에는 더불어민주당 설훈 의원이 강제근로로 인한 임금채권의 소멸시효 기산일을 근로계약이 종료된 날 혹은 근로자의 법정대리인이 강제근로 사실을 안 날 중 먼저인 날로 정하는 내용의 근로기준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했습니다. 법안을 발의한 의원들은 “장애인을 부정한 방법으로 근로하게 해 재산상 이익을 취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명문화하고, 강제근로 등에 대한 임금채권의 소멸시효 기산일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기 위함”이라고 그 취지를 밝혔습니다.

헌법재판소와 국회는 과연 어떤 판단을 할까요? 억울하게 착취당한 장애인들이 다시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겠습니다.

김민제 기자 summ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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