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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 (월)

한강의 소설이 디디고 선 고통 [젠더 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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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금남로. 계엄군은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외치며 신군부의 내란 및 군사반란에 저항하는 시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학살을 자행했다. 5·18기념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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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정 | 젠더팀장





읽고 멈추길 반복하다 제대로 읽지 못한 책들이 있다.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가 그랬다. 널리 알려져 있듯 소설의 배경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다. 이미 10년 전 출간된 소설임에도 어린 망자와 산 자가 들려주는 참혹한 증언이 쉬이 읽히지 않았다.



잊고 있던 이 책이 생각난 건, 지난 9월30일 서울 국회도서관 강당에서 열린 ‘5·18 성폭력 피해자 증언대회―용기와 응답’ 영상과 취재 메모를 본 뒤였다. 어느덧 예순을 넘긴 여성 네 명이 눈물과 두려움을 감추지 못한 채 300여명 앞에서 5·18을 증언했다. 제한된 시간과 축약된 말 사이로 너무 생생해 외면하고 싶었던 소설 속 장면이 겹쳐졌다.



지난 2018년 ‘이대로 영원히 묻혀버릴까봐’ 용기를 내어 성폭력 피해를 공개 증언한 김선옥(66)씨는 1980년 5월22일 전남도청에 들어선 날을 잊을 수 없다. “시멘트 바닥에 시체들이 있었습니다. 한쪽 얼굴에 총상 입고 죽은 사람, 꽝꽝 말라 있는 사람 (…) 충격을 받았습니다.” 주검을 보고 기절하는 가족을 병원으로 안내하고, 야간통행증이나 외신기자 출입증을 만들었다. 그해 7월 교생실습을 하던 학교에서 상무대로 연행됐다. “잠을 재우지 않았습니다. 군인이 화장실 문을 열고 총을 겨누고 볼일을 보게 했습니다.” 석방 직전 담당 수사관은 그를 성폭행했다.



열아홉이던 김복희(63)씨는 5월26일 도청으로 향했다. 나흘 전, 계엄군이 쏜 총에 사랑하던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정신이 반은 나가 있었고 (집에) 쪽지를 써놓고 도청으로 갔습니다.” 무자비한 진압으로 고1 학생들마저 희생된 27일 새벽, 그 역시 도청에 있었다. “계엄군에 머리를 맞고 끌려 나오다 쓰러져 있는 사람을 많이 보고…. 빨갱이라는 소리도 들었고요.” 국가는 이들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았다. “조사를 받던 중 상의를 올리고 바지를 내리고 너무 수치스러웠지만 울면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해 갔다가… 그곳에서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살아 돌아왔으나 살아갈 의지를 빼앗긴 채 고통의 터널을 지나야 했다. 성폭력 피해는 그의 생 전반에 어둠을 드리웠으나 꺼내놓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 드러내는 게 너무 두렵지만” 국가가 자신 같은 피해자의 존재를 인정하길 바라며 용기를 내어 드러낸 진실이다.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계엄군 등의 작전 상황이나 연행·구금·조사 과정에서 성적 모욕과 성고문, 성추행, 성폭행이 있었다. 총과 대검을 이용한 위협과 납치, 구타와 그로 인한 유산과 하혈, 자궁 적출 같은 폭력 피해가 중첩됐다. ‘진상규명 결정’(16건)으로 피해 사실을 인정받은 다수는 사건 뒤 자살을 한 차례 이상 시도했다.



그간 홀로 분투해온 피해생존자이자 증언자들은 최근 자조모임 ‘열매’를 꾸려 서로의 손을 잡았다. 열매 대표를 맡은 김복희씨는 증언대회에 함께한 청중을 향해 당부했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이라도 우리가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끝까지 관심을 놓지 말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국가는 아직 성폭력 피해 특수성을 반영한 배·보상이나 명예회복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의혹 사건 중 일부만 조사했으므로 모든 피해가 드러난 게 아니다. 증언을 믿을 수 없다며 5·18을 왜곡하고 깎아내리는 말들도 여전히 소란스럽다. 모든 비극의 시작점인 최종 발포 책임자는 아직도 가려내지 못했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쓰며 거의 매일 울었다”, “압도적인 고통으로 쓴 작품”이라고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렇게 쓰인 글이 쉽게 읽힐 리 없다. “우리는 다 고통을 느끼는 인간이기 때문에 연결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어라는 불완전한 도구를 통해 아주 깊이 내려가서 뭔가를 말하면 읽는 사람이 같이 깊이 내려와서 읽어준다고 믿어요.”(2022년 서울국제도서전 강연 중)



짐작조차 어려운 고통에 조금이라도 닿길 바라며 책을 다시 펼쳤다.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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