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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 (월)

미국에 희망 걸고, 미국에 배반 당한 ‘외교독립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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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100돌]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계기

외교 통한 독립운동 본격화

서재필·이승만 ‘독립청원’ 했지만

미, 이미 일본에 한국점령 밀약

임정, 워싱턴회의에서 문전박대

미 승인 받으려는 시도조차 좌절

신탁통치 시작되며 분단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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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민 자신들을 빼놓고는 세계에서 한국 국민들보다 미국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일찍이 한국이 외국과의 교역에 문호를 연 이래로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의 외국이 거의 한국 땅에서 이기적인 개발 착취 아니면 정치적인 세력 부식(불리기)의 목적을 추구하는 것을 보았지만, 미국과 더불어서는 그러한 것을 찾아볼 수가 없었던 때문입니다. 미국은 오히려 수백명의 선교사를 보내왔으며, 그 선교사들은 탄압받는 불행한 한국인들에게 이 현세에서의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주기 위하여 성경을 가지고 갔습니다. 이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의 노력은 병원·학교의 건설과 과학·예술·음악의 가르침과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정신을 동반하여 이루어졌습니다. 그들 미국인 개척자와 선교사들은 이같이 해온 것입니다.”

100년 전 4월, 미국 동부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한국의회’ 회의에서 좌장 격인 서재필은 이렇게 말했다. 당시 미주 한국인들의 대미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갑신정변에 참여했다가 가족 모두 화를 입고 혈혈단신 미국 망명길에 오른 서재필에게 미국은 더더욱 은혜의 땅이었을 것이다. 역적의 가족으로 몰려 부모와 형, 아내가 음독자살하고 동생 재창은 참형을 당했으며 아들(2살)은 보살핌을 받지 못해 굶어 죽었을 때, 그의 나의 19살이었다.

그러나 망명객이 아니더라도 당시 한국인들에게 미국은 조선을 일본으로부터 독립시켜줄 유일한 강대국이었다. 윌슨이 주창한 이른바 ‘민족자결주의’가 100년 전 한국인들에게 더 크게 와닿은 것은 그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미국의 대통령이기 때문이었다. 1919년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을 불러온 이른바 ‘외교독립론’의 시작과 끝은 모두 미국에 있었다. 그 시종을 좇는 여정은 ‘미국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기도 했다.

12일 오후(현지시각), 필라델피아에는 부슬비가 내렸다. 1919년 4월 서재필, 이승만 등 미주지역 한인들이 모여 3일 동안 ‘제1차 한국의회’를 연 ‘리틀극장’은 시내 주택가에 자리해 있었다. 200여석 규모의 2층짜리 흑갈색 벽돌 건물로 지금도 공연 장소로 활용될 정도로 잘 보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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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한국의회 100주년을 맞아 12일부터 사흘 동안 서재필기념재단과 ‘필라델피아 한인회’가 마련한 기념행사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첫날 저녁 리틀극장에서 시작된 재현행사에는 필라델피아를 비롯해 펜실베이니아주에 거주하는 한인들, 펜실베이니아 주의회, 필라델피아 시의원 등 미국 정치인들과 뉴욕총영사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국가보훈처 관계자 등 250여명이 함께했다. 연사로는 안창호를 기리는 흥사단 관계자와 이승만기념사업회 쪽 인사가 잇따라 배정돼 있었다. 행사 관계자는 “두 단체가 서로의 불참을 전제로 행사 참여 의사를 밝혀왔다”고 귀띔했다. 100년 전 그날처럼 양쪽 사이에는 긴장과 불편함이 놓여 있었다.

이튿날에는 풍물패를 앞세운 500여명의 행렬이 예전 그 경로대로 시가행진을 벌였다. 어린 학생부터 나이 든 이민자들까지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필라델피아 시내를 돌았다.

당시 행사를 주재한 서재필과 이승만은 파리강화회의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강화회의보다 미국 정부에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일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해서다. 한국의회가 미국 여론을 활용하기 위한 방안으로 ‘미국에 보내는 호소문’과 시가행진을 기획한 이유다.

미주 한인 독립운동은 외교독립론과 함께 의열투쟁의 발원지이기도 했다. 1908년 장인환·전명운 의사가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곳도 샌프란시스코였다. 이들의 의거를 계기로 일어난 재미 한인단체 통합운동의 결과로 1910년 5월 대한인국민회가 출범했다. 그 중심에 도산이 있었다.

대한인국민회는 1938년 4월, 7천달러의 의연금으로 지금의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 근처에 총회관 건물을 지었다. 총회관 건립으로 대한인국민회는 샌프란시스코 시대를 마감하고 로스앤젤레스로 옮겨왔다. 16일 오전, 총회관 앞은 한산했다. 기념관 안에는 안창호의 사진과 ‘무실역행’(務實力行) 편액이 걸려 있었다. 실질을 중히 여기고 실천에 힘을 다했던 도산의 삶이 녹아든 휘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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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은 1920년 1월 “군사 면에서 당면한 우리의 과제는 전쟁밖에 없다”며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국민개병주의에 입각한 군사훈련을 강조했다. 그는 실력양성론자였지만 무장투쟁론자이기도 했다. 그는 외교독립론의 허망함을 모르지 않았다. 1905년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일본의 한국 점령을 비밀리에 승인한 것도 미국이었다. 이런 미국이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독립시켜줄 것이라 본 것은 순진한 생각이었다. 임정 초기 내무총장이었던 안창호가 서로군정서 소속의 이상룡에게 편지를 보내 외교독립론에 대한 우려를 전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의 우려대로 미국 행정부는 한국인들의 독립청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당시 미국에 한국 식민지 문제는 대외정책의 하위 변수에 불과했다. 외교독립론은 1921년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열린 ‘워싱턴 군축회의’(해군 군비축소 및 태평양·극동 문제에 관한 국제회의)를 끝으로 설득력을 잃었다. 임시정부가 별도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대응해온 워싱턴회의에서 한국 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당시 <동아일보> 특파원 김동성의 현지 보도로 국내에 전해지면서 민족운동 진영은 크게 동요했다. 외교독립론의 허망한 결론은 소련에 대한 기대를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운동론과 독립전쟁론, 그리고 친일의 길로 나뉘게 되었다.

이후에도 외교를 통한 독립 노력은 미국에 대한 임정 승인 시도로 이어졌다. 그러나 애초부터 미국은 임정을 승인할 마음이 없었다. 1942년 이래 3단계에 걸쳐 마련된 미국의 한반도 정책의 핵심은 임정을 통한 자치가 아닌 신탁통치였다. 조선이 해방될 때 자치정부를 인정하게 되면 산업시설의 국유화 위험이 적지 않은데다 아래로부터의 경제적 요구가 분출되면서 위기가 초래될 수 있다고 미국은 판단했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겠다는 3·1운동의 한 계기는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미국을 통해 마련됐다. 역설적이게도 일본으로부터 되찾은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진 한 계기도 미국 때문이었다. 3·1운동 100주년은 우리에게 미국이라는 규정력을 넘어 한반도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역량과 지혜에 기반을 둔 또 다른 의미의 ‘외교독립론’이 있는지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필라델피아·로스앤젤레스(미국)/글·사진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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