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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남은 정년 1년… “그래도 정규직을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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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기분야 정부 출연연 비정규직 “직고용 방침 이행하라” 주장



경향신문

일러스트 김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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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명.’

과학기술 분야 25개 정부 출연 연구기관(출연연)의 정규직 전환 대상 파견·용역노동자 총 2739명 가운데 정규직으로 전환된 노동자 수다. 정부는 2017년부터 출연연 파견·용역노동자에 대한 정규직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전환방식을 두고 노사 간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용역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작업은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선(先) 노사 합의’라는 기존 입장만 거듭 밝히고 있다.

출연연에서 선호하는 정규직 전환방식은 직접고용 대신 자회사 설립을 통한 고용승계 방식이다. 2월 14일 현재 25개 기관 가운데 22곳이 자회사 방식을 추진하고 있다. 반면 용역노동자들은 직접고용을 주장하며 투쟁을 벌이고 있다. 시설·경비·미화 업무를 맡고 있는 파견·용역노동자들은 고령으로 대부분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노동자들이다. 정규직 전환이 되더라도 곧 회사를 나가야 한다는 의미다. 그럼에도 이들은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왜 정규직을 원하는 걸까.

“차별의 대물림 끊겠다”

ㄱ씨(64)는 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서 30년 동안 시설관리 업무를 해온 용역노동자다. ㄱ씨가 연구원 측으로부터 ‘통보’받은 정년은 65세. 1년 뒤 회사를 떠나야 한다. 용역직은 별도의 정년이 없다. 하지만 ‘원청’인 연구원에서 암묵적으로 시설 용역직의 정년을 65세로 정했고, 이 방침은 규정이 됐다.

1990년 ㄱ씨는 ‘정규직’으로 입사했다. 하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인원 감축 바람이 불면서 ㄱ씨와 같은 기술직 노동자들은 구조조정 1순위에 올랐다. 결국 ㄱ씨는 2000년에 용역직원이 됐다. 연구원 ‘기계주임’이 용역업체 소속 노동자가 된 것이다.

같은 일터였지만 업무환경은 달라졌다. 가장 큰 변화는 업무량이었다. 폐수처리 업무처럼 담당자가 따로 있는 일이 ‘덤’으로 얹어졌다. 폐수에 약품을 탔고 폐수처리작업이 제대로 됐는지 여부도 확인했다. 실험용 생쥐를 비롯한 동물 관리도 ㄱ씨와 같은 시설 용역직 몫이었다. 연구원 ‘정규직’ 시절에는 하지 않던 일이었다.

근무시간도 늘었다. ㄱ씨를 포함한 시설 용역 노동자 3명이 돌아가며 회사를 지켜야 했다. 이들은 1년 365일 중 122일을 회사에서 보냈다. 명절도 따로 챙길 수 없었다. 지난해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소식을 듣고 연구원 측에 인원 보충 계획을 제안해 봤지만 대답조차 들을 수 없었다.

이렇게 일을 해도 법정 야간·휴일 근로수당을 받지 못했다. 문제를 제기했다가는 다음해 용역계약을 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ㄱ씨를 비롯한 시설·경비 용역노동자들은 지난해 노동조합에 가입한 뒤 대전지방고용노동청에 임금체불 진정을 제기했고 받지 못한 22개월치 초과근무수당의 절반가량을 용역업체로부터 돌려받았다. 이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용역직원의 임금과 처우 수준을 정하는 연구원 측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았다.

업무환경과 처우보다 ㄱ씨를 힘들게 한 건 차별이었다. ㄱ씨와 관련된 업무지시를 비롯해 업무와 관련된 의사결정은 모두 ‘원청’인 연구원에서 이뤄졌다. 그럼에도 연구원 내 용역직원들은 늘 ‘외부인’이었다. 무엇보다 10년 동안 같은 정규직이었던 입사 동기·동료들의 싸늘한 시선을 견디기 어려웠다. 단합대회와 같은 공식 행사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아무런 기준 없이 연구원에서 시키는 일을 해야 했고 지시를 따라야 했다. ㄱ씨는 “언젠가부터 ‘나는 정규직의 하인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내가 겪은 차별의 아픔을 남아있는 용역직원들에게 물려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투쟁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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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앞에서 출연연 간접고용 노동자 직접고용 쟁취를 위한 집회가 열리고 있다. / 공공연구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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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 고착화 부를 ‘자회사’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에서 청소일을 하는 미화 용역직원 ㄴ씨(66)도 3년 뒤 연구원을 떠나야 하는 고령 노동자다. 연구원에서 직접고용한다 해도 정규직으로 일할 수 있는 기간은 3년 남짓이다. ㄴ씨를 비롯한 15명의 미화 용역노동자들은 대부분 60대로 ㄴ씨와 비슷한 처지다.

“단 하루만이라도 좋으니 무시당하지 않는 정규직으로 일하고 싶습니다.” ㄴ씨의 말이다.

ㄴ씨는 매년 12월이 되면 사표를 쓴다. 이후 1월에 새 용역업체로부터 연락이 오면 계약을 한다. 전화를 받지 못하면 그 길로 다른 일터를 찾아야 한다. 다행히 ㄴ씨는 8년째 일을 하고 있지만 해마다 일자리를 잃는 동료들을 봐왔다. ㄴ씨와 같은 미화 용역노동자들이 계약이 끊길까봐 불안해 하는 이유다. 이들의 출근시간은 주중 오전 6시40분이지만 절반 이상이 1시간 일찍 출근한다. 연구원의 지시는 아니지만 행여 사측에 밉보일까봐 노동자 스스로 출근시간을 당긴 것이다.

ㄴ씨는 출연연에서 추진 중인 공동출자회사 채용을 통한 정규직 전환에 반대한다. 자회사 방식으로는 용역직에 대한 차별이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본다. 소속이 다르면 같은 직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ㄴ씨는 경험을 통해 익혔다. 여기에 자회사는 일방적으로 정년 조정이 가능하고 경영상태에 따라 해고도 가능하기 때문에 당초 고용안정이라는 정부의 정규직 전환정책 취지와도 맞지 않는다. ㄴ씨는 “연구원에 직접고용이 된다고 해도 오래 일할 수 없고 처우가 나아지는 게 아니다”라며 “그저 일하는 곳에서 규정에 따라 업무지시를 받고 사람 대접 받으며 일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출연연 측은 노동자의 직접고용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정규직 전환이 되면 지속적으로 처우개선과 임금인상을 요구할 것이라 부담이 크다’는 게 이유다. 직접고용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당장의 전환 비용은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출연연의 한 고위 임원은 “본질은 박사급 연구원들이 느끼는 상실감과 박탈감”이라며 “정규직 전환에 따른 기존 연구원들의 사기저하가 심해서 대규모 이탈 움직임도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조 측의 주장은 다르다. 직접고용에 비해 자회사로 전환하는 게 더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것이다. 민주노총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의 분석자료에 따르면 시설관리 용역노동자 20명이 근무하는 한 연구원의 경우 자회사 전환 비용이 직접고용보다 연간 1억2000만원 더 소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상협 공공연구노조 조직국장은 “출연연이 책정한 자회사 대표이사의 연봉만 3억원”이라며 “자회사 설립은 과기부와 연구회 관료들을 위한 자리 만들기 작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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