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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7 (토)

경희대 재학생·졸업생들이 ‘신흥무관학교’ 이름으로 뭉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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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일가 전재산 처분해 세운 신흥무관학교

3500명 졸업생 독립운동 투신 항일투쟁의 주역

해방 뒤 ‘신흥대학’ 됐지만 6·25전쟁 뒤 주인 바뀌어

1960년 ‘경희대’로 개명…‘신흥’의 역사 사라져

총동문회-총학생회, 협약 맺고 경희대 뿌리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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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학교 총동문회와 경희대 총학생회가 ‘경희대의 뿌리는 신흥무관학교’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나섰다.

경희대 총동문회와 총학생회는 지난 14일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대 총동문회관 대회의실에서 ‘경희역사교육을 위한 총동문회-총학생회 협약식’을 맺고 역사 알리기에 함께 나서기로 했다고 16일 밝혔다. 이들은 경희대가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특강 개최, 경희역사연구소 건립 등을 추진하겠다고 설명했다.

경희대 총동문회는 수년째 경희대의 뿌리가 신흥무관학교에 있다고 주장해왔다. 신흥무관학교는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1911년 만주 서간도에 설립된 학교다. 2015년 개봉된 영화 <암살> 속 캐릭터 ‘속사포’(배우 조진웅)가 이 학교 출신 독립군으로 나오기도 했다. 1910년 우당 이회영 선생 일가는 전 재산을 처분한 돈 40만원(현재 가치 600억원 상당)을 들고 만주에 와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웠고, 1920년 폐교될 때까지 3500여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나석주, 김원봉, 지청천 등 독립운동가들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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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는 광복 이후 우당 선생의 동생인 성재 이시영 선생에 의해 1949년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신흥초급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6·25전쟁 등을 거치며 학교 재정이 어려워졌고, 1951년 조영식 박사가 학교를 인수하면서 1954년 캠퍼스를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으로 이전했다. 1960년엔 이름도 ‘경희대학교’로 바뀌었다. 이 일로 이시영 선생의 아들 이규창이 개명무효 소송 등을 제기하는 등 우당 일가와 법정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총동문회는 ‘개명’으로 인해 경희대에서 신흥무관학교의 역사를 찾기 어려워졌다고 설명한다.(▶관련기사: 경희대는 왜 신흥무관학교 흔적과 뿌리를 없앴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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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총동문회와 총학생회가 ‘경희대의 뿌리는 신흥무관학교에 있다’는 역사 알리기에 나섰다. 총동문회는 “경희대학교의 뿌리는 신흥대학이며, 신흥대학은 독립군을 양성하던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며 “내년은 경희대학교 70주년과 신흥무관학교 108주년이 되는 해다. 경희의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자는 취지로 협약식을 맺게 됐다”고 밝혔다. 총동문회 관계자는 “신흥무관학교의 자주독립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각계에서 노력하는데, 정작 신흥의 적자라 할 경희대만 침묵하고 있으니 답답한 일”이라며 “이제라도 경희대가 신흥대학의 자주독립 정신을 계승하는 진정한 민족 사학임을 천명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신민정 기자 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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